냉면 맛에 빠진 조선의 임금들
조선 임금 중에는 고종이 냉면을 좋아했다. 시원한 동치미 육수에 사리를 말아 편육과 배, 잣 등을 고명으로 얹은 냉면을 즐겨 들었다. 고종을 모셨던 상궁을 통해 전해진 이야기다.
냉면은 가장 한국적인 국수이니 고종이 냉면을 좋아했다는 사실이 특별할 것도 없을 것 같지만 역대 조선 왕 중에서 냉면을 먹은 임금은 많지 않다. 기록상으로는 제 23대 왕인 순조가 가장 빠르다. 즉위 첫 해인 1800년, 한가로운 밤이면 당직 서는 군관과 선전관을 불러 함께 달구경을 하곤 했다.
어느날 밤, 시장기가 돌았는지 달을 감상하다 냉면을 사먹자며 당직 군사에게 대궐 밖에서 냉면을 사오라고 시켰다. 그 중 한 명이 혼자만 돼지고기를 사왔기에 어디에 쓸 고기냐고 물었다. 냉면에 넣으려 한다고 대답하자 임금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냉면을 나누어 줄 때 돼지고기를 사 온 군사는 제쳐두고 “그 자는 따로 먹을 음식이 있을 것이다.”라며 주지 않았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실린 내용으로 얌체 같은 신하를 꾸짖는 내용이지만 냉면을 주지 않은 순조 역시 대범하지는 못했다. 다만 이때 순조 나이가 열 한 살이었으니 아무리 임금이라도 눈 밖에 난 사람까지 포용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다. 특이한 사실은 순조가 먹을 냉면을 궁궐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대궐 밖에서 사왔다는 사실이다. 당시 한양에 냉면 파는 집이 많았던 모양이다.
순조의 뒤를 이은 헌종 때에는 궁중 잔칫상에 냉면이 오른다. 궁중 잔치에는 주로 따뜻한 온면을 차리지만 이때 처음 냉면이 차려졌다. 헌종 14년인 1848년, 헌종의 할머니이자 순조의 왕비인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60세 생일과 어머니인 왕대비 신정왕후의 4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창경궁 통명전에서 성대한 잔치가 열렸다.
이 잔치의 진행 절차와 차려진 음식 등을 상세하게 기록한 ‘진찬의궤’에 냉면을 준비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는데 메밀국수 다섯 사리와 돼지다리, 양지머리, 배추김치, 그리고 배와 잣 등의 재료로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헌종 다음 임금인 철종도 냉면을 무척 좋아했다. 얼마나 냉면을 좋아했는지 칠월 칠석에 냉면과 전복을 과식해 체했을 정도다. 임금의 동정을 비롯해 각종 국사를 기록한 일기인 ‘일성록’에 보이는 내용인데 7월 15일자의 기록이니 일주일 넘게 고생했을 정도로 체증이 오래 갔던 모양이다. 한 여름인 칠석날 더위를 식히려고 찬 냉면을 많이 먹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후임 임금인 고종이 냉면을 좋아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졌다. 그런데 고종이 즐겼다는 냉면 역시 사리는 궁궐 밖 대한문의 국수집에서 사다가 냉면을 만들었다고 한다. 임금이 좋아하는 음식을 궁궐에서 직접 만들지 않고 밖에서 사왔던 이유가 무엇일까?
짐작해 보면 조선 후기 한양에 냉면 외식업이 무척 발달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때 쯤 이미 냉면이 평양 특산음식에서 벗어나 국민 국수로 자리매김한 것일 수 있다.
또 하나는 냉면의 경우 서민의 음식에서 시작했지만 마침내는 임금의 입맛까지 사로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냉면은 그 반대의 과정을 밟은 것이다. 시작은 미미했으나 끝은 창대했으니 냉면이 한국 국수를 대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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