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울 달린 고양이에게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이 동물우화는 에도 나오고, 조선 숙종 때의 학자 홍만종이 쓴 에도 ‘묘항현령(猫項縣鈴) ;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이란 제목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서양의 구분 없이 널리 알려진 우화요, 속담이다.
굳이 내용 설명이 필요 없는 얘기다. 그런데 이 우화는 이제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가 되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라니, 어느 시절 얘기인가. 이미 고양이들이 방울을 달고 있는데 말이다.
뭔 얘기인가.
잘 알려진 대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의 주체는 ‘쥐’다. 그런데 요즘 쥐의 입장에서는 고양이 눈치 볼 일이 없어졌다. 쥐가 고양이를 만날 일도 거의 없다. 생활환경이 크게 바뀐 탓이다. 집고양이들은 쥐를 잡을 시도조차 못하고, 할 생각도 없다. 때가 되면 밥걱정 안 해도 되는데, 왜 쥐를 잡겠는가. 고양이와 사랑에 빠진 ‘애묘인’이 지극정성 떠받드는데 수고할 일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집에서만 자란 고양이들은 쥐를 만나면 놀라 뒷걸음치는 경우도 있단다.
“내가 왜 쥐를 잡아! 먹을게 천지인데..야옹!” 지난 1990년대 초반 한 일간지에 게재된 소설가 정의명의 생활콩트, 의 마지막 문장이다. 쥐를 잘 잡으라고 여주인이 던져준 생선을 물고 가던 고양이 캐시가 주인을 뒤돌아보면서 속으로 내뱉은 말이다. 이 글은 사실 25년 전에 풍자성으로 쓴 글이었다. 요즘 상황을 견준다면 소재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풍자의 소재가 보편화됐기 때문이다.
사냥 걱정을 안 해도 되는 집고양이들이 할 일은 주로 잠을 자는 것이다. 길냥이에 비해 훨씬 잠을 많이 잔단다. 신이 인간을 위해 무섭고 사나운 호랑이를 애완동물로 만든 게 고양이라는 ‘애묘인’들의 표현만큼, 냥이들은 그에 걸 맞는 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다. 고양이들은 분명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쥐의 입장에서는 ‘고양이 목에 방울이 달린 것’으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란 풍자시를 쓴 독일 시인 에리히 캐스트너(1899~1974)가 만약 최근에 살고 있다면 아마도 로 바꾸어 썼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고양이들의 야생성이 사라져가고 있는 오늘, 과연 쥐들은 살판이 났을까. 괜히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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