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스리나갈에서 온 편지

인도를 여행한 많은 젊은 친구들이 인도의 매력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제가 며칠간 보고 느낀 건 발전과 정체의 중간이라는 기분입니다. 다분히 주관적이고, 깊히 이해하지 못한 부족함의 소산이기는 합니다.

 

캐시미르의 수도 스리나갈에 도착했습니다. 어제 급하게 비행기 표를 구하느라 비행기 시간을 알려주지 못했더니 현지 여행사에서 공항에 나오질 않았습니다. 경찰 네댓 명이 날 둘러싸고 여러 가지 질문을 합니다. 저는 한 장의 프린트 물을 주며 "여기에 전화해서 날 픽업하게 해달라"하고 여행사가 도착하기 전까지 날 보호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공항을 나오니 군대가 일정 거리마다 줄을 서 있을 만큼 많이 있습니다. 역시 갈등 지역, 위험 지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차에서 내려 수상 택시를 타고 비스듬히 누워 수로를 따라가니 달맞이하는 기분입니다. 그러길 몇 분, 오늘 묵을 'Boat House'에 도착했습니다.

 

보트 위에 지어진 숙소임에도 어제 묶은 게스트 하우스보다 몇 배 아늑했습니다. 응접실과 화장실이 달린 커다란 독방이 저의 거처입니다. 24시간 wi-fi가 되고, 가끔은 게스트 하우스가 흔들리는 안성 맞춤의 휴식 장소였습니다.

 

스리나갈의 수상택시, 이걸타고 하우스 보트로 간다.

 

하우스 보트의 야경

 

관광을 하며 마주치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니, 인도라고 하기엔 너무나 다른 얼굴과 모습들입니다. 캐시미르는 이전의 힌두 왕국시대는 물론, 무굴 시대에도, 영국 통치시대에도, 2차 대전이 끝나고 인도가 독립을 한 후에도 독립 왕국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947년 인도가 무력으로 합병하여 인도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물론 파키스탄도 이 땅을 원했으므로 파키스탄의 침공도 동시에 이루어졌으나 인도의 점령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잠무, 캐시미르의 분쟁은 인도, 파키스탄의 분쟁이 아니라, 파키스탄의 도움을 받은 캐시미르 독립무장 세력과 인도와의 충돌이라고 봐야합니다.

 

캐시미르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들은 스스로 페르시아에서 왔다고 합니다. 고대 페르시아는 후라산 지역(이란 북부와 현 투르크매니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서부지역)이 근거지고, 실크로드를 따라 넓게 이주했습니다. 한 때 실크로드의 주인이었으나 몽골 초원에서 이주한 투르크계 유목민에게 자리를 내주고 밀려나 현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정착했으며, 캐시미르인들도 페르시아의 핏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여자, 남자 모두 코가 크고 생김새가 멋있습니다. 히잡 뿐 아니라 부르카를 쓴 모습,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모습도 그렇고 인도라고 보기에 어색할 정도로 이색적입니다. 캐시미르에 무슬림이 들어온 건 10세기경입니다.

 

8세기에 고구려 유민 고선지가 탈레스 전투에서 패하며 중앙아시아가 무슬림의 영역이 되었고, 9세기에 지금의 신강인 동투르키스탄에 무슬림이 들어왔으며 10세기경에 캐시미르도 무슬림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라크에서부터 걸어 이 곳까지 온 수피를 이 곳에 이슬람을 전도한 주인공으로 드는데, 그가 불교의 땅인 캐시미르를 무슬림의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동이 없는 모스크, 특이한 구조. 현대 모스크는 이슬라마바드의 파이잘 모스크도 그렇고 돔이 없는 형태로도 지어진다.

 

모스크에서 나오는 부르카를 쓴 여인들, 여기기 중동인지 착각할 정도다.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여성들의 모습, 보통 대청 밖 별싱에서 하며 천으로 가리기도 한다.

 

캐시미르 샤슬릭, 아르메니아 샤슬릭이 유명한데 캐시미르가 샤스릭이 더 맛있다고 자부한다. 이유는 소스때문이란다

 

큰 코와 맵시있는 눈을 갖은 페르시아 여인, 인도 속의 페르시아다.

 

역사의 빈 공간, 확실하지 않은 정황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한 번 채워봅니다. 알렉산더는 중앙아시아에 진출한 후 최후로 카불 고원을 통치하는 자와라지(지역 통치자)를 굴복시킵니다. 이로써 인도로 들어갈 만반의 준비가 끝난 줄 알았는데 산악 부족의 강렬한 저항에 부딪힙니다. 그들과의 전투는 쉽지 않았습니다. 겨우 승리했지만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았습니다.

 

대왕 알렉산더는 그 부족의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바로 첫번째 부인 록산나입니다. 물론 알렉산더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통합을 위해 성대한 결혼식을 주선했으며 그 자리에서 본인도 다리우스 3세의 딸과 즉, 페르시아의 공주와 결혼했습니다. 이렇게 두 번의 결혼을 했지만 알렉산더는 성애주의자였습니다. 아무튼 록산나를 얻음으로써 산악 부족은 알렉산더의 휘하에 들어갔고, 록산나는 힌두 쿠쉬를 넘어 인도 대륙으로 진출한 알렉산더와 같이 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인도에서 항명사건으로 인해 철군을 했습니다. 대왕은 다시 인도에 올 예정이었기 때문에 교통의 요지인 간다라에 하나의 군단 병력을 놓고 왔습니다. 이들은 대왕이 죽자 본국과 단절하고 간다라 왕국을 세워 그리스, 인도, 중앙아시아 문명을 융합한 간다라 문명을 만들어 냈습니다.

 

의문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돌아갈 때, 올 때와 달리 힌두 쿠쉬를 넘어가지 않고 사막을 가로질러 갔습니다. 산악 부족인 록산나의 후손들이 대왕을 따라갔을까? 그들도 대왕의 약속을 믿고 인도 땅에 남지 않았을까? 대왕은 33세의 나이에 모기에 물려 죽었고, 알렉산더와 록산나 사이에 낳은 유일한 자식과 록산나는 셀레우스코에게 이용만 당하고 독살을 당합니다. 알렉산더의 핏줄은 세상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두 개의 씨앗은 간다라와 캐시미르 왕국을 만들지 않았을까요?

 

간다라는 에프탈 훈에 의해 멸망하고 인도의 힌두 세력에 쫓겨 산 넘고 물 건너 깊은 계곡 속 훈자로 숨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룩산나의 부족은 어찌되었을까, 그들도 인도 힌두 세력에 쫓겨 지금의 캐시미르 산중으로 숨어버린게 아닐까? 캐시미르 사람은 스스로 페르시아의 핏줄이라고 말합니다. BC 4세기경 쫓아냈다는 동네도 지금의 감숙성입니다. 소그디아, 카불 고원하고는 아주 먼 거리입니다. BC 4세기경 알란인(이란계 민족 전부의 통칭)이 중앙아시아의 주인일 때입니다.

 

지금의 투르크 벨트(터어키에서 시작해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키르키즈스탄, 싱강위구르 자치구)는 당시엔 알란인 벨트(이란 북부, 투르크매니스탄, 소그디아나, 카불 고원, 간다라)가 있었습니다. 투르크벨트에 고립되어 있는 현재의 형세로 볼 때 그들은 알렉산더를 따라 힌두 쿠쉬를 넘었다가 인도 대륙에 정착한 알란인, 록산나의 후손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투르크의 거센 바람으로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알렉산더는 미스테리하기만 합니다. 역사에서 사라질 하나의 부족을 인도에서 데리고 나와 짚시라는 떠돌이 이상주의 집단을 만들고, 중앙아시아에서 사라질 부족을 깊은 캐시미르에 숨겨놓기까지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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