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와빠루] '나비와 빠루' 시리즈를 시작하며

[노트펫] 아침 식사를 마치면 습관처럼 아메리카노 한 잔을 손에 들고 거실로 간다. 날이 추워도 더워도 손에 쥔 커피 잔은 늘 차갑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며 머리를 의도적으로 냉정하게 식힌다.

 

이렇게 하면 이성은 냉철하게 빛난다. 물론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시선은 아파트 앞 공원을 행한다. 철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공원의 풍경을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꽤 괜찮은 일상의 출발이다.

 

커피는 비즈니스에 좋다. 오늘은 무슨 글을 쓰고, 무엇을 처리할지 정하려면 차분하고 정확한 판단이 필요하다. 그럴 때마다 차가운 커피만큼 도움을 주었다. 인생 최고 조력자(helper)가 빈 말이 아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이 정도 남으면 어김없이 회상에 빠진다. 2018년 8월 촬영

 

그런데 커피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역할에 변화가 생긴다. 일상의 판단에 필요한 커피는 정확히 절반이다. 나머지 커피는 지나간 일의 회상을 위해 사용한다. 이렇게 커피는 시간의 역순(逆順)으로 그 쓰임새를 달리 한다.

 

커피를 마시며 회상하다 보면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오는 단골손님이 있다. 나비와 빠루, 어린 시절 같이 살던 털복숭이 친구들이다. 나비는 노란색 집고양이다. 나비의 모색을 요즘 말 표현하면 코리안 쇼트헤어 치즈 태비(Korean short-hair cheese tabby)에 해당된다. 뭔가 안 맞는 옷을 입은 인위적인 느낌이 드는 영어식 이름이다. 그 이름이 입에 달라붙지 않는다.

 

빠루는 순백의 스피츠견이다. 1970년대는 마당에서 스피츠를 번견(番犬)으로 키우는 경우가 많았다. 번견은 가정에서 집을 지키는 경비견을 뜻한다. 스피츠는 계절적으로 털갈이를 심하게 한다. 그때가 되면 할아버지는 먼저 빠루 전용 빗으로 털을 빗기고, 마당을 빗자루로 쓸었다.

 

지인의 스피츠. 유기견을 입양하여 11년째 키우고 있다. 나이는 13살 정도로 추정된다. 빠루는 사진 속 스피츠보다는 체구가 좀 더 컸다. 2021년 5월 촬영

 

나비와 빠루, 그 두 친구 덕분에 어린 시절 추억은 대추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것처럼 풍성하기만 하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떠오르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평생을 이어온 동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그 친구들로부터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대는 모든 물자가 귀하던 시절이다. 먹고 사는 것도 힘든 당시 사진을 인화한다는 것은 호사스러운 취미활동으로 분류되었다. 그래서 나비와 빠루의 사진은 남아있지 않다. 결국 두 친구들과의 추억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온전히 머릿속 기억에 의존해야만 한다.

 

추억 중에는 물론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는 선명한 것도 있다. 하지만 흐릿하거나 파편적으로 흩어진 것도 있어서 당시 상황을 필자보다 잘 아는 분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한 두 분의 조력자가 존재한다.

 

어둠이 내린 1970년대 주택가 풍경. 2021년 7월 수도산 달동네박물관에서 촬영

 

오래된 도자기는 여러 곳에 흠이 가고 심지어 깨어진 곳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부모님은 필자의 어린 시절 동물과의 인연에 대한 추억 재생 작업의 도우미 역할을 해주셨다. 추억이라는 도자기의 흠을 채우고 오히려 더 빛나게 만들어 주었다.

 

필자의 할아버지는 전직 농부였다. 소, 돼지, 닭 사육 경험이 풍부하셨다. 할아버지는 매사 서투른 손자를 위해 나비와 빠루의 보호자 역할을 자임하셨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개와 고양이의 밥만 챙기지는 않았다. 볕 좋은 날 마당에서 “동물을 잘 키우기 위해서는 그 동물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특히 좋아했던 부분은 1920~30년대 강원도 호랑이 이야기였다. 당시 두메산골에서 사셨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너무 재미있어서 또 해달라고 조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도 이야기보따리의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또 하자.”는 식으로 이야기를 끊곤 했다.

 

필자가 올해 6월 발간한 ‘동물인문학’(인물과사상) 서문에 ‘동물 이야기 전기수(傳奇叟)’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적이 있다. 전기수는 마을을 순회하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맛깔나게 들려주는 전문 이야기꾼이다. 이런 꿈은 40여 년 전 할아버지가 주신 소중한 선물이기도 하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나비와 빠루’ 시리즈는 앞에서 말 한 여러 이야기를 얼버무려 40~50부작 정도 연재할 예정이다. 독자 여러분께 많은 성원과 관심을 거듭 부탁드린다.

 

동물인문학 저자 이강원(powerranger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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