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환(虎患)을 일으킨 맹수는?

[나비와빠루] 제 15부 
1980~1990년대 비디오에는 불법불량 비디오 시청을 경고하는 공익광고가 삽입됐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많이 시청된 내용이기도 하다.

 

[노트펫] 노란 얼룩무늬를 가진 고양이 '나비'는 자신의 본업인 쥐 사냥에 충실했다. 나비는 거의 매일 한두 마리의 쥐들을 잡아 현관문 앞에 진열했다. 자신이 얼마나 성실한 고양이인지, 얼마나 사냥에 능숙한 지 자랑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침마다 열리는 나비의 전시회에는 간혹 쥐 대신 다른 동물들이 보일 때도 있었다. 참새 같은 작은 새들이었다. 나비는 쥐뿐 아니라 새 사냥에도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가을 오후, 동생들과 같이 과자를 마당에서 먹었다. 마당에서 과자를 먹으면 부스러기를 땅에 마음껏 떨어뜨려도 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흘리지 말고 먹으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니, 한겨울이 아니면 과자는 으레 마당에서 먹었다.

 

바닥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는 참새 같은 전혀 예상치 않은 손님을 초대하기도 했다. 참새가 등장하면 햇볕에 잠을 자던 나비의 사냥 본능은 발동되었다. 나비의 쥐던 새던 사냥을 하려면 자신의 몸을 잔뜩 웅크리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마치 꾹 누른 스프링 같은 상태로 자신의 몸을 만든 나비는 참새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당에는 다른 관중이 있었다. 나무 위에 있던 다른 참새는 자신의 종족이 위험에 처하자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날카롭게 지저귀는 동족의 경고에 과자를 먹던 참새는 재빠르게 하늘로 날고 말았다. 나비는 다시 햇볕을 찾아 몸을 눕히고 잠을 청했다.

 

낮잠을 즐기고 있는 아무르표범. 이미 멸종된 한국 표범과 같은 아종(亞種)이다. 2018년 7월 미국 미네소타동물원

 

마당에서 나비의 사냥 장면을 같이 보던 할아버지에게 필자는 “나비는 호랑이나 표범 같은 사냥꾼”이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호랑이나 표범을 같이 말할 때는 간단히 ‘범’이라고 하면 된다.”고 정리했다.

 

그러면서 필자가 태어나고 자랐던 부산 ‘범내골’이라는 동네의 기원에 대해서도 애기해주었다. 범내골의 ‘범’은 호랑이와 표범을, ‘내’는 작은 하천(川), ‘골’은 골자기(谷)를 뜻하는 것으로 옛날에 범의 출입이 잦았던 천변(냇가, 川邊) 마을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호랑이 이야기가 나온 김에 호환(虎患)에 대한 얘기를 더 해주었다. 호환은 호랑이(虎)에게 입은 患(환)으로, 사람이나 가축이 호랑이에게 피해를 입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산골 사람들에게 들은 것이라며 사람이 입는 호환 피해 중 표범이 벌인 것이 상당수라고 했다.

 

표범은 평소 나무에 숨어 있다가 사람 혼자 지나가면 위에서 공격하는 습성이 있어서 산골 사람들은 표범에게 해를 입지 않으려고 나름의 대응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고개를 넘어갈 경우, 혼자 길을 나서지 않고 반드시 장정 여럿이 같이 넘었다고 했다.

 

표범의 주된 생활공간은 나무 위다. 2018년 6월 미국 브리검영대학 자연사박물관

 

1980~90년대 대표적 소일거리는 비디오테이프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테이프를 틀면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 불법비디오를 시청함으로써 비행 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는 공익광고부터 시작됐다.

 

수 백 번을 본 광고에는 아이를 물고 가는 호랑이가 나오는데, 할아버지 말씀을 참고하면 이는 ‘일반화의 오류(hasty generalization)’가 될 수도 있다. 호랑이인지, 표범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정체를 알 수 없도록 실루엣(silhouette)으로 등장하는 게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동물인문학 저자 이강원(powerranger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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