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일본에 선물한 친

개인과 개인, 국가와 국가 간에는 친목을 더욱 두텁게 하는 목적으로 선물을 하곤 한다. 특히 국가 정상이나 외교 사절들은 대개 빈손으로 만나지 않고, 자국의 특산물이나 기념품을 가지고 만난다.

 

일본의 사서인 속일본기에는 서기 732년 신라 33대 임금인 성덕왕의 사신으로 온 김장손이 쇼무일왕(聖武, 재위 724~749)에게 오늘날 친(Chin)의 선조가 된 작은 개를 선물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노트펫 친


신라 사신을 통해 일본으로 전래된 친은 그곳 왕실, 귀족 등과 같은 특권층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게 된다. 돌출된 눈과 움푹 들어간 코, 각지지 않은 둥근 이마는 살아 있는 귀여운 인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대 동아시아의 외교 관례상 개를 선물하는 것은 비단 신라-일본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반적 관례였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 역사서인 당서(唐書)에는 현종(玄宗, 재위 724~749)이 733년 신라 성덕왕에게 개 세 마리를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당시 당나라-신라-일본에서 선물로 주고받은 개들은 티베탄 스패니얼 계열의 삽살개들로 추정하고 있다. 굳이 지금의 견종 분류법으로 보면 페키니즈, 친, 라사압소 같은 개들의 공통 선조에 해당되는 개들이었을 것이다.

 

ⓒ노트펫 라사압소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친이 신라에서 일본으로의 전래된 시점이다. 서기 732년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재위 31년에 해당하는 되는 해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국력이 전성기에 해당될 때였다.

 

친이 전래되기 직전까지 신라와 일본은 개를 주고받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가 아니었다. 양국은 지난 수십 년 간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단절된 적대적인 사이였다. 그런데 왜 개를 갑자기 주고받으면서 친목을 도모하였을까? 이는 멸망한 제국 백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


왕족, 귀족 등 지배층 상당수가 백제계였던 일본은 멸망 직전의 백제를 두고 보기만 하지는 않았다. 일본은 모국이나 마찬가지였던 백제의 부흥을 위해 수만의 대군을 파병하여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대규모 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삼국통일 과정에서 신라와 일본은 무슨 전쟁을 벌였을까? 서기 660년 신라와 당의 나당연합군은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백제를 공격하여 당시 수도였던 사비성을 함락하고 31대 의자왕을 비롯한 많은 왕족과 귀족들을 당으로 압송한다. 이로써 백제는 공식적으로 멸망한다. "이제 백제는 완전히 끝났다"고 나당연합군은 생각했겠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백제 부흥의 움직임은 공식 멸망 1년 후인 661년부터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일본서기에는 661년 백제 30대 무왕의 조카 복신(福神)이 백제 부흥을 외치자, 이에 호응한 군세가 백제 땅에서 수만을 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백제 수도 사비성에는 당의 장수 유인원(劉仁願)이 대군을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지만 백제 부흥군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662년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은 덴지일왕(天智天皇, 재위 661~672)의 도움으로 170여 척의 전함을 이끌고 부흥군에 합류한다.


백제 부흥군은 이런 과정에서 적지 않은 수의 성을 회복하였다. 백제 부흥운동은 마치 큰 성과를 거둘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부흥운동의 두 주역 복신과 부여풍은 권력을 두고 다툼을 벌이게 되고, 결국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비극이 일어난다.


663년 9월 부여풍이 이끄는 백제 부흥군과 일본군과의 연합군은 나당 연합군과 금강 하구인 백강(白江)에서 운명의 전쟁을 벌인다. 그러나 결과는 극적이게 끝나지 않는다. 세 차례 크게 싸웠으나 세 번 모두 나당연합군이 크게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로써 백제 부흥 운동은 완전 종결되고 만다.


이 패배 이후 일본 귀족들은 영원히 조상을 모신 묘를 보지 못하게 된다. 일본 입장에서는 신라는 같은 하늘아래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것이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는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기 마련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당시 후진국이었던 일본은 경제적, 문화적 필요성 때문에 신라와의 교역이 절실히 필요하게 된다.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 신라와의 국교 정상화, 교역 재개는 자신들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문제였다. 일본은 대규모 외교 사절단을 신라에 파견하고 지속적으로 외교 관계 재개를 요청하였다.


외교관계를 재개하거나 새로 맺을 때는 특산품이나 희귀한 동물을 서로 교환하며 우의를 다지는 것은 동서고금의 관례이다. 한국전쟁에서 서로 수십만의 사상자를 기록하였던 미국과 중국도 그랬다.


양국이 국교를 재개한 1972년 중국은 멸종위기동물 팬더를 이용한 외교를 펼쳤다. 중국은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을 기념해 그해 4월 링링과 싱싱이라는 한 쌍의 팬더를 워싱턴 국립동물원에 선물하고 양국의 우호를 상징하게 하는 계기로 활용했다.


2010년 중국에서 일본으로 수출된 만두에서 맹독성 농약이 검출되게 되자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서 큰 문제로 비화되게 된다. 당시 중국 정부는 일본사회에서 불기 시작한 반중감정을 누그러 뜨리기 위해 일본에 팬더 1쌍을 10년간 대여하는 외교 전술을 펼친다. 이렇게 희귀 동물 팬더를 이용한 중국의 소프트한 외교전술을 '팬더외교'(Panda diplomacy)라고 부르기도 한다.


친이 일본과 신라의 국교가 재개된 성덕왕 때 일본에 전래되었다는 것도 향후 양국의 우애를 다지기 위한 상징으로 활용된 것 같다. 특히 친의 가까운 친척인 라사압소, 페키니즈 같은 티베탄 스패니엘 계열의 개들이 사자개 역할을 하며 악령을 물리치는 영험한 힘이 있다는 속설이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당시 친에게도 이런 벽사의 기능까지 부가되지 않았을까하는 추측도 든다.

 

ⓒ노트펫 페키니즈


다만 아쉬운 것은 신라에서 일본에 전래된 친의 선조가 우리나라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에는 공통 선조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페키니즈, 라사압소, 친 같은 어여쁜 소형 삽살개가 여전히 전해지는데, 우리나라에만 소형 삽살개의 맥이 끊긴 것은 너무나 아쉬운 사실이다.

ⓒ 반려동물 뉴스 노트펫,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