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소와 양치기개
[나비와빠루] 제45부
[노트펫] 양치기개는 인류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증거다. 모든 개의 혈관에는 자신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사냥꾼의 본능이 흐르지만, 양치기개는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자신의 본능을 극복하고 오히려 사냥감인 양과 염소 같은 초식동물들을 지키기 때문이다.
양치기개가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실함과 헌신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단 한순간의 방심이나 게으름이 생기면 가축을 늑대나 곰 같은 맹수들에게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양치기개는 집이나 건물을 지키는 번견(watch dog, 番犬)으로도 탁월하다.
1970년대 한국 단독주택의 마당은 우리 민족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진돗개 혹은 그 믹스견들이 주로 지켰다. 진돗개 다음은 빠루 같은 스피츠였다. 드물게 독일 셰퍼드(German Shepherd)도 있었다. 오히려 요즘 독일 셰퍼드를 보는 게 당시보다 힘든 것 같다. 이는 한국인의 보편적 주거형태가 단독주택에서 공동주택 위주로 바뀐 게 원인인 것과 같다.
초등학교 2학년 어느 주말, 아버지는 직장 동료 한 분을 집으로 모셔왔다. 그런데 그 분의 품에는 3개월 정도 된 셰퍼드 강아지가 있었다. 어리지만 얼굴에는 월드 클래스 명견(名犬)의 당당함이 보였다. 빠루가 괴롭히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이는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빠루는 어린 셰퍼드가 풍기는 카리스마에 이미 그 기세가 눌린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신입생 양치기개를 유독 애지중지(愛之重之)했다. 강아지가 집에 온지 한 달 정도 된 일요일 아침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할아버지와 함께 마당의 평상에 앉았다. 할아버지는 그날도 양치기개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빠루보다 양치기개를 애지중지하는 이유를 여쭤봤다. 할아버지의 행동에는 가족들이 모르던 이유가 숨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필자의 아버지가 대학에 입학했을 즈음 할머니를 병환으로 잃고 말았다. 할머니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자 일만 하던 할아버지는 난감하게 되었다.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미성년 자식이 셋이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할머니 생전에 할머니에게 당신은 새벽부터 밤까지 밖에서 일하면서 가족들의 생활비를 버는 일소(역우, 役牛)라고 하면, 할머니는 자신은 어린 자식 넷이 잘 자라도록 알뜰하게 지켜주는 양치기개(목양견, 牧羊犬)라고 대답하곤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두 분의 금슬(琴瑟)은 이렇게 좋았다곤 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혼자 일소와 양치기개 역할을 동시에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일이 얼마나 힘들고 견디기 어려웠는지 모른다며, 할아버지는 손자와의 대화 말미에 눈물까지 글썽 그렸다. 할아버지는 새로 온 신입생을 보다가 할아버지는 자신의 힘들었던 지난 세월이 겹쳐 보인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과는 달리 신입생 양치기개는 필자의 집에서 100일도 살지 못했다. 급작스러운 전염병으로 급사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파보바이러스(parvovirus)로 추정된다. 양치기개가 죽었을 때도 할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할아버지는 이미 수십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어린 손자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하게 맺혔다.
*동물인문학 저자 이강원(powerranger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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