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안데스 고원의 시작

인간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은 3,890m의 높은 고도에서 문명이 탄생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이유로 이렇게 높은 곳에서 문명을 이룩했을까요, 티티카카와 마주하며 품게 된 첫 번째 질문은 어려운 난제입니다. 잉카의 시조가 처음 내려왔다는 티티카카, 하늘과 가까워 이리로 내려왔을까요.

 

현생 인류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는 파밀 자락의 마고성(환단고기에서 말하는 최초의 문명국인 환국 혹은 신국이 있었던 자리)은 고도가 3,500m입니다. 고도가 높은 지역에 문명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 정녕 하늘과 가까웠다는 이유밖에 는 없을까요, 태평양의 뮤 대륙과 대서양의 아틀란티스 대륙은 바다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플라톤은 아틀란티스 대륙의 크기를 리비아와 아시아를 합친 것보다 크다고 말합니다. 플라톤이 아는 아시아가 지금의 이란을 포함하는 오리엔트에 한정된다 하더라도 유럽 대륙에 버금가는 크기입니다. 뮤(태평양에 존재한 대륙)와 아틀란티스(대서양에 존재한 대륙), 레뮤리아(인도양에 존재한 대륙)가 어떠한 실마리를 가져다줄 것 같습니다.

 

높은 대지에 문명이 피어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제임스 처치워드의 'Last Continent of MU'나, 그레이엄 핸콕의 '신의 지문'의 의견을 무시로 일관해서는 안 될지도 모릅니다. 대륙이 침몰할 때에도 일부의 생존자는 있었고 그들은 산간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살아남았던 그들이 고지대에 문명을 고집했던 이유는 충분합니다.

 

그들은 언젠가 다시 닥칠 종말의 시간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험이 시간에 대한 집착이라는 마야, 아즈텍, 잉카의 독특한 문화 성향을 낳았는지 모릅니다. 뉴욕, 런던, 상해 등 바다를 끼고 있는 현대의 거대 도시들이 침수의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이니 이들의 우려가 우려만은 아닙니다. 그럴지라도 3,900m는 문명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높은 고도입니다.

 

티티카카에 사는 개구리는 피부로 산소를 흡수하느라 쪼글쪼글합니다. 희박한 공기를 흡입해야하기 때문에 표면적이 주름 잡히면서 늘어난 결과입니다. 또한 안데스의 주민은 심장과 폐가 더 크며 혈액 속의 적혈구도 많다고 합니다. 높은 대지에 적응했다고 하더라도 몸은 편안했을까요, 안데스의 주민들도 고도를 힘들어한 건 그들의 생활 속에 잘 나타납니다. 샌디라는 티티카카의 안내자는 작은 비닐봉투에 코카 잎을 가득 가지고 다니며 쉬지 않고 씹어 먹습니다.

 

구수한 둥굴레차 맛이 나는 코카 잎을 씹으면 6시간 정도는 배가 고프지 않고 힘이 솟아나며 혈액 순환이 잘되어 열이 난다고합니다. 코카 잎에는 16가지의 칼로리가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샌디는 저에게도 코카잎을 권합니다. 코카 잎은 신체 반응을 무디게 하는 일종의 최음제 성분이 포함된 높은 칼로리의 식물입니다. 그러니 덜 피곤하고 덜 고통스러우면서도 힘이 나며 배고픔을 잊게 해주는 것입니다.

 

적게 먹고도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다주니 좋은 노예 음식입니다. 그렇다보니 과다 섭취는 몸에 좋을 리 없습니다. 안데스에 피어난 문명은 그렇게 고통을 잊어가며 살아남으려 애쓴 결과물입니다. 강 하구의 풍요를 활용했다면 훨씬 쉬웠을 텐데, 불편한 자연 환경을 이겨내면서까지 고원 대지에 살아남으려 한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고원 대지에 피어난 문명의 궁금증을 안고 티티카카 호수의 섬을 찾아갑니다. 티티카카는 코르디예라 오리엔탈(Cordillera Oriental)과 코르디예라 옥시덴탈(Cordillera Occidental) 사이에 갇힌 알티플라노 고원의 한 부분이며 지능인 코르디예라 레알 산맥에 갇힌 거대한 내륙 바다이기도 합니다. 티티카카의 면적은 8,372㎢로 우리나라의 충청남도의 면적과 비슷합니다.

 

호수는 1,000 ~ 1,200의 주기로 수량이 줄었다 늘었다를 반복하는데 볼리비아 쪽의 티티카카에서 차로 약 2시간 정도 소요되는 티와나쿠 유적지에 부두 유적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티티카카가 확장됐을 때에는 지금보다 약 두 배 정도의 크기로 추측됩니다. 티티카카 유람은 배를 타고 약 2시간 30분을 달려 따낄레 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티티카카에는 총 60개의 섬이 있으며 그 중 잉카가 시작한 태양의 섬, 그 옆에 짝을 이룬 달의 섬, 세계 유일의 인공섬인 우로스, 잉카의 전통이 가장 잘 살아있다는 따낄레 섬이 주요 관광지에 들어갑니다. 첫 방문지인 따낄레 섬은 잉카의 전통인 공동 소유가 지켜지는 섬입니다. 모든 결정은 마을의 원로들이 모이는 회의에서 결정되며 개인의 문제들과 다툼은 공동체의 기준에 의해 정리됩니다. 안내자 샌디는 잉카의 방식 그대로라며 살을 붙입니다.

 

문명의 궁금증을 안고 찾아간 티티카카 호수의 섬

 

배에서 내린 후 섬을 종단하는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맨 처음 맞이하는 것이 마을 입구를 알리는 아치형 문입니다. 문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길을 따라 밭이 펼쳐지고 가끔 판매를 위한 가판이 펼쳐져 있습니다. 밭에는 키누아와 감자, 옥수수가 심어져 있는데 키누아가 특히 눈에 뜨입니다.

 

키누아는 붉은 색과 흰색의 종류가 있습니다. 낱알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마치 수수대 같으면서 색이 화려하고 우아한 가장 완벽한 식품입니다. 유일하게 나트륨이 없고 식물이면서 동물성과 같은 수준의 높은 단백질 함유량으로 우주인들의 음식이라는 수식어 등 다양하게 불립니다. 3,500m 이상의 고원에서만 재배가 가능하여 현재 페루, 볼리비아, 에콰도르의 산간 지역에서만 재배하고 있다고 합니다. 왼편으로 펼쳐진 바다 같은 호수를 보며 약 1시간 30분가량 걸으면 따낄레 섬의 중심 광장에 닿습니다.

 

티티카카 섬의 아치형 마을 입구

 

안내자 샌디는 따낄레 섬의 볼거리라면서 저를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닙니다. 목사님이 안계시기 때문에 항상 문이 닫혀있다는 성당, 의사는 있지만 환자가 없어 휴업이라는 보건소, 남자들이 만든 수공예 제품을 판매한다는 공판장 등을 차례로 돌아봅니다. 누군가 물건을 사려고 흥정을 하지만 물건의 금액은 전혀 내려가지 않습니다. 처음 말한 금액만을 반복할 뿐입니다.

 

따낄레 섬은 공동 소유이므로 물건의 값이 내려가지 않습니다, 순번에 의해 여기서 물건을 팔 뿐이고 정해진 시간만 채우면 되므로 물건의 금액은 내려갈 리 없습니다. 어찌 보면 가장 좋은 거래입니다.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마음이 편합니다. 결국 동행인은 물건을 사지 못합니다. 비싸서가 아니라 익숙하지 못해서입니다. 사람은 가격을 깎아야 이득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제 값에 사면 손해 본 듯 정서적인 불안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식당에서도 이어집니다.

 

샌디의 안내로 밭 사이를 돌아 넓은 앞마당에 식당을 차린 가정집에서 점심 식사를 합니다. 저는 샌디에게 조금 전의 상황에 대해 물었습니다. "식당도 공동체에서 정해주나? 그럼 금액과 메뉴까지 모두 같은가?" 답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식당의 순번도 공동체에서 정하니 영업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날 주어진 손님을 받아 정해진 음식을 제공하면 그만입니다. 참으로 속편한 사람들입니다. 현대 사회의 스트레스는 경쟁이 원인입니다.

 

경쟁을 배제한 이들의 삶에서 배울 점은 없을까요, 샌디의 설명을 빌리면 평균 따낄레 섬의 수명은 90세인데 노인들은 죽을 때까지 흰머리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기농 음식, 맑은 공기, 스트레스 없는 삶 등 그들의 머리가 하얗게 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꼭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기저기 게스트 하우스를 짓고 있습니다. 또한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물건을 팔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따낄레 섬 주민들에게도 돈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을 도시에 보내고 학교에 보내려는 부모들의 마음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따낄레 섬이 미래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머지않아 머리가 하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티티카카 섬의 공동체 시장

 

배는 우로스 섬에 우리를 내려놓습니다. 물 위에 뜬,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섬으로 알려져 있는 우로스 섬은 토토라 갈대(Totora Reeds)로 만들어진 섬입니다. 섬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 토토라 뿌리 더미를 잘라내고 그 안에 나무 쐐기를 박아 뿌리 더미를 서로 고정시킵니다. 그렇게 섬 크기만큼 면적을 만든 후 그 위에 2m 크기의 토토라를 말려 쌓아 올린 섬입니다.

 

토토라는 물에 쉽게 썩기 때문에 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15일마다 새로운 토토라를 쌓는다고 합니다. 현재 섬은 약 130여개에 달하는데 젊은 친구들은 대부분 도시로 나갔기 때문에 섬을 유지하기 위한 노동이 고되다고 마을 대표는 하소연합니다. 이들도 도시로 나가 주거하며 섬으로 출퇴근할 날이 멀어 보이지 않습니다.

 

섬의 유래를 보면 9대 잉카인 파차쿠텍이 티티카카를 정복할 때 잉카를 피해 섬으로 주거지를 옮겼던 우로스족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모든 섬에는 망루가 세워져 있습니다. 바닥이 단단하지 않은 갈대 섬에 망루를 세우는 것이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텐데 섬마다 이를 마다하고 세운 것은 아픔이 담긴 전통인 것 같습니다.

 

톱으로 잘라 섬을 분리할 수도 있고 쐐기 나무를 묶어 두 개의 섬을 하나로 이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정시킨 끈을 풀어 이리저리 섬을 이동시킨다는 것 역시 해군이 없는 잉카를 피한 우로스인들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안내자 샌디는 토토라로 만든 배를 한 번 타보라고 권유합니다. 두 개의 토토라 배 위에 나무 갑판을 얹고 작은 전망대가 있는 2층으로 만들어진 배에 오릅니다.

 

나일강에는 토토라와 같은 종류인 파피루스가 있고 이집트는 파피루스의 부력을 이용해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배는 나무로 만든 배보다 부력이 훨씬 좋아 1,000km나 떨어진 애스원에서 석재를 날라 피라미드를 짓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파피루스로 만든 두 개의 배를 고정시키고 그 위에 갑판을 얹고 다시 2층 상판을 얹은 펠루카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녀가 안토니우스를 만나 갈 때에도 화려하게 치장한 파피루스 배를 타고 갔습니다. 만드는 방법, 재료, 배의 구조까지 똑같은 토토라 배와 파피루스 배, 두 대륙은 문명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티티카카에서 과거의 미스터리에 다시 집착하게 됩니다.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자 아테네 시민들의 비겁을 탓하며 떠납니다. 그는 여행 중 이집트를 찾았고 신관들에게서 들은 아틀란티스의 전설을 자신의 저서 '티마이오스'(Timaeos, 대화편)에 남깁니다.

 

"아틀란티스에는 넓은 평원이 있고 수도는 높은 봉우리에 있으며 대운하를 통해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기원전 9,500년경 대지진과 홍수가 일어 난지 하루 만에 섬 자체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섬이 가라앉기 전 아틀란티스의 모습은 왕궁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설비와 건물이 있는 3개의 육환대(陸環帶), 바닷물을 끌어들인 3개의 둑이 동심원상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구체적인 서술을 합니다.

 

현대에도 그런 건축물들이 있습니다. 미래를 꿈꾸는 도시 두바이의 '팜 주메이라(Parm Jumeirah)'와 상상할 수 있는 곳 아틀란티스(Atlantis)의 모습입니다. 과거의 도시 유적 중 플라톤이 서술한 모양의 도시는 티와나쿠(Tiwanacu)입니다. 티티카카의 물을 끌어들여 수로로 감싼 도시 구조가 플라톤이 설명한 아틀란티스의 모습과 가장 닮았기 때문입니다. 티와나쿠 유적지에 들어서면 모든 사실이 혼란스럽습니다.

 

천문관측소로 추정되는 칼라사사야(Kalasasaya)는 주변 민족들이 모여들어 천문을 관찰하는 관측소였습니다. 한마디로 신문명의 요람이자 지식이 퍼져나간 선진문명의 보고입니다. 문명의 창달자인 바라코치가 머무른 장소라는 전설과 무관해보이지 않습니다. 안데스의 주변 민족들에게 선진 문명을 가져다 준 존재, 비라코차는 누구일까요.

 

그는 흰 얼굴에 긴 망토, 슬리퍼를 신고 얼굴에 수염이 난 모습입니다. 아테네의 학자이거나 이집트의 지식인, 예수의 모습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은 오래 전부터 타 문명권과 교류하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은 여러 가지 가설을 주장합니다. 다른 문명과 같은 발전 단계를 거치지 않고 신석기 혹은 청동기에서 고차원의 석조 건축물인 천문학과 수학적인 높은 지식을 이룬 것을 볼 때는 우주인이 남긴 것이라는 우주인 문명설이 있습니다.

 

피라미드의 건축, 태양 숭배, 티티카카 토토라 배, 머미(mummy) 유물, 비라코차의 전설 등으로 볼 때는 이집트인들이 이주한 것이라는 이집트 문명설, 타 대륙과 교류가 없어 문명의 발전에 불균형이 일어났다고 보는 자체 문명 발전설 등 다양한 주장이 있지만 무엇 하나 명료하지 않습니다.

 

확인이 가능한 시간을 쫒아가 보면 빨간머리 에릭(Erik)은 아이슬란드 내 작은 부족의 리더로서 부족 간의 경쟁에서 밀려 고향을 떠나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섭니다. 마치 이들의 선조가 제비뽑기로 30%씩 고향을 떠나게 한 것과 같이 척박한 땅에 인구가 증가하면서 생기는 자연 현상입니다.

 

에릭은 고향을 떠난 바이킹이 프랑스와 영국의 땅을 지배한 것과 같이 새로운 땅 그린란드(GreenLand)와 아메리카의 빈란드(VinLand, 포도의 땅)에 식민지를 만듭니다. 콜럼버스보다 약 500년 앞서 나가니 서구적인 시각에서 최초의 발견자는 분명 에릭입니다. 하지만 그가 건설한 식민지는 그린란드에서 쉽게 오갈 수 있는 북아메리카의 동부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안데스 문명과는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어느 문명이 안데스 문명과 교류했을까요, 그리고 그 시기는 언제일까요, 우리의 지식을 바꾸고 다시 대지의 기억을 추적해봐야 겠습니다.

 

티와나쿠의 중심 칼라사사야는 황도경사에 의해 지어졌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포스난스키(Posnansky)는 태양의 표준 방위각과 차이가 나는 몇 개의 건축물들을 조사하여 칼라사사야가 약 15,000년 전에 건축된 건축물임을 주장합니다. 그가 내세우는 주장의 근거는 황도경사(전체의 적도와 지구의 적도 사이의 기울기)입니다.

 

지구가 똑바로 서있다면 경사가 없겠지만 지구는 다행히도 태양을 향해 기울어져 있고 22도 1분과 24도 5분 사이에서 변화합니다. 그런데 그 주기가 약 41,000년입니다. 너무나 긴 시간이라 보통의 상식으로는 좀처럼 확인하기 어려운 변화입니다. 그런데 남미 대륙에서는 이처럼 긴 시간에 집착하는 여러 증거들이 나타납니다. 마야의 시간뿐만이 아닙니다. 포스난스키 교수 또한 그 점에 집착했습니다.

 

그는 황도경사에 따라 아주 조금씩 일출과 일몰의 각도가 변하기 때문에 태양의 표준 방위각과 차이가 나는 건물들을 조사하여 칼라사사야가 건설되었을 때의 황도경사는 23도 8분이고 현재의 경사와 비교하여 기원전 약 15,000년이라고 건설 시기를 계산해냅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칼라사사야에 있는 태양의 문에는 46마리의 톡스톤(Toxodon)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톡스톤은 약 160만 년 전 이 지역에서 번성하다 기원전 약 12,000년경에 멸종된 수륙 양생의 포유류입니다. 그들은 본적도 없는 톡스톤을 어떻게 신정의 문에 새겨 넣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여기서 다시 묻게 됩니다.

 

톡스톤은 3m가 넘는 강한 동물입니다. 수륙 양생인 톡스톤은 티티카카 호수에 살며 오가는 배와 티와나쿠 주민을 괴롭혔던 무서운 동물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톡스톤을 신전에 조각했다면 톡스톤의 존재를 두려워했거나 경배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톡스톤이 살아있었을 때 지어진 신전이 아닐까요,

 

전체 유적지의 5%밖에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오래도록 방치되어 흔적이라고는 가져갈 수 없는 거대한 돌덩이인 유적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티와나쿠의 규모를 추축하는 데에는 충분합니다. 티와나쿠의 전성기는 기원 후 약 500년경이고 약 50만 명이 살았을 거대한 대도시입니다. 이는 아즈텍의 테노치티틀란이나 잉카의 쿠스코보다 큰 규모이며 훨씬 앞선 시대입니다.

 

잉카의 황녀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Garcilaso de la Vega)는 잉카가 멸망하고 아직 티와나쿠가 황폐화되기 전 티와나쿠의 모습을 남깁니다. "거대하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티와나쿠의 건축물에 대해 서술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티와나쿠에 대해 언급한 첫 서술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잉카의 황녀로서 잉카의 모든 유적을 접해봤을 텐데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위대한 건축물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꼬야족이 티와나쿠를 떠나 잉카를 건설하고 잉카를 지배한 숨은 지배자였다는 추측은 추측이 아닌 진실처럼 보입니다. 위대한 문명을 창달한 티와나쿠의 후예이기 때문입니다. 티와나쿠의 마지막은 문명의 창시자인 콘티 비라코차상이 있다는 지하 신전과 박물관을 돌아보는 것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콘티 비라코차의 석상이 지하 신전을 지배하듯 베넷 석주로 이름 붙여진 거대 석상은 하나의 박물관을 지배합니다.

 

대지의 신 파차 마마(Pacha mama)의 석상이라는데 어쩌면 잉카의 상상인지도 모릅니다. 두 석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스트 섬의 모아이상과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쪽 바다를 그리며 선 모아이상은 서쪽 어딘가에 있을 고향을 그린다고 합니다. 콘티비라코차의 석상은 태양을 등지고 서 있는데 그 자리가 원래의 자리인지 알 수 없으니 석상의 진심을 알기 어렵습니다.

 

베넷 석주도 어딘가를 그리는 마음이 담긴 석상인지도 모릅니다. 모아이상처럼 서있지 않고 땅에 묻혀있는 상태로 발견되었으니 어디에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안내하는 파블로는 손의 위치, 얼굴 모양, 하반신의 비늘모양의 문양을 들어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합니다. 저는 그런 여행 국가에서 나온 규격화된 설명 말고, 석상이 간직한 비밀이 알고 싶습니다. 질문도 대답도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석상의 비밀은 누가 알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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