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기요마사의 호랑이 사냥 이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제2군 사령관으로 이땅에 상륙했다. 불국사를 불태우고, 한양을 점령한 후 함경도까지 유린한 장수였다.

 

제1군 사령관이었던 또 다른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라이벌로 기억되는 가토 기요마사는 과시 욕구가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의 독특한 행적을 보고 있자면 그가 왜 그렇게 호랑이를 사냥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m가 넘었던 오징어 투구

 

가토 기요마사는 당시 일본의 지배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외조카(7촌)다. 가토는 왜소한 자신의 체구를 감추기 위해 요즘말로 '키높이 투구'라고 부를 수 있는 1m가 넘는 이상한 투구를 쓰고 다녔다.

 

물론 이런 불편한 모자를 전장에서는 사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의 옛 영지인 구마모토(熊本)에는 아직도 오징어머리 같은 모양의 괴이한 투구를 쓴 그의 동상이 있다.

 

한양 최초 입성 허위 보고서 문제

 

가토 기요마사는 출세 욕구가 강한 장수였다. 임진왜란 당시 그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먼저 한양에 입성했지만 엉터리 서류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 자신이 제일 먼저 한양에 입성했다고 거짓 보고까지 한다.

 

물론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당시 침략군의 행정총괄 역할인 부교를 맡았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에게 가토 기요마사의 거짓 보고는 적발되었고 오히려 큰 망신을 당하게 된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평소 호불호가 뚜렷한 인물로 알려졌다. 지나치게 강한 성품 때문에 많은 적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평소 가토 기요마사와는 원만하지 못한 관계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일부러 가토 기요마사를 곤경에 빠뜨렸을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다.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중간에 일본으로 귀국하는 데, 이시다 미쓰나리의 비판적 보고서 때문에 한동안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지도 못한다. 상당 기간 접근 자체가 봉쇄됐다.

 

임진왜란 당시 호랑이 사냥에 나선 가토 기요마사.

 

호랑이 사냥

 

가토 기요마사의 허장성세는 함경도에서 극에 달한다. 그는 함경도로 북상한 후 자기가 즐겨 사용한 긴 창을 가지고 호랑이 사냥을 즐겼다. 거대한 오징어 머리 투구를 쓰고 사람 키보다 긴 창을 사용하여 호랑이 사냥을 하는 것은 누가 봐도 자기 과시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도 일본에서 과거 조선에서 호랑이 사냥을 한 것을 자랑하고 과시했다고 전해진다.


가토 기요마사는 전쟁 중에 자신이 사냥했던 호랑이의 가죽과 고기는 배편으로 오사카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상납했다. 이런 그의 행동은 자신의 대단한 충성심을 자신의 주군에게 보여주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또한 조선군과 백성들에게 '호랑이를 잡는 가토' '호랑이 가토'같은 공포의 이미지를 심어주어 전쟁을 수월하게 이끌려는 의도적 계략일 수도 있었다.

 

웅장한 규모의 구마모토성

 

가토 기요마사는 1598년 일본으로 후퇴하면서도 대단한 악행을 조선에 저지른다. 정유재란 당시 조명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과 압박으로 가토의 군대는 울산성에서 전멸할 뻔하였다. 당시 상황과 일부 기록을 보면 그는 당시 울산성에서 할복하고 생을 마감하려 한 것 같다.

 

하지만 가토 기요마사는 원병(援兵) 때문에 겨우 목숨을 건지고 울산성에서 탈출하게 된다. 당시 울산성에 주둔하던 왜군들은 식량과 식수가 부족하여 엄청난 고통을 겪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게 이유였던지 잘 모르겠지만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 내 자신의 영지인 구마모토에 일본 최고의 난공불락 성채를 건설한다. 바로 구마모토성(熊本城)이다.

 

그는 이 성을 축성하기 위해 임진왜란 종료 전에 구마모토로 수많은 울산 백성들을 끌고 갔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남의 땅에서 한 많은 인생을 마무리했다. 지금도 그들의 원혼은 가토 기요마사를 원망하고 저주할 것 같다.

가토 기요마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는 구마모토성과 가토 가문의 영지를 몰수한다. 신흥 막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척인 가토 가문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토 가문의 영지는 호소가와(細川) 가문에게 대신 전해진다. 조선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생사람은 이역만리 타향으로 강제로 끌고간 가토 기요마사의 악행에 대한 업보가 아닐까 싶다.

엄청난 규모의 성을 쌓고 수백 개의 우물을 만든 것은 그의 과시욕구가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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