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삼바의 도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관계는 악어와 악어새 같이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같이 할 수는 없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의 관계인가요?
대항해시대를 열고 세상을 동, 서로 절반씩 나누어 가질 때만 해도, 포르투갈의 항의로 스페인이 한발 물러나 브라질을 양보할 때까지만 해도 두 나라는 건전한 경쟁 관계였습니다. 한때는 한 나라이기도 했고요… 이베리아 반도의 주인은 지중해를 지배하는 세력이었습니다.
첫 주인은 지중해에 무역을 연 페니키아인이었고, 그 뒤로는 카르타고,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로마, 북에서 이주한 게르마니아, 북아프리카에서 세력을 뻗친 이슬람 왕조 순으로 지배세력이 바뀌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지중해의 주인이었었죠.
지중해가 유럽이던 시대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하나의 운명체였지만 다른 민족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북에서 내려온 게르마니의 한 세력인 수에비족이 포르투갈에 자리를 잡았고 같은 게르마니아인 서고트족이 스페인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프랑스로 옮겨가고 땅을 지배하는 봉건영주들이 실질적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중세 유럽엔 새로운 땅에 대한 집착이 일어났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이런 흐름을 교황의 권위회복에 활용했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레콩기스타(국토회복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레콩기스타는 이교도로부터 땅을 빼앗으면 주인이 될 자격이 주어지는 일종의 특혜이기 때문에 충분한 영지를 갖지 못한 기사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400년간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이베리아를 통일한 카스티야 왕조는 전쟁을 겪는 동안 주머니는 털리고, 무력을 지닌 세력들을 달래기는 해야 해서 그 과정으로 인해 대 항해로 돌파구를 찾아 선진국이 되었으니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어울리는 선택입니다. 스페인만의 역사가 아닙니다. 포르투갈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베리아 반도를 회복한 세력은 국가라는 공동체에 모이고 다툼 끝에 스페인, 포르투갈 두 개의 나라로 독립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나라는 세상을 향해 나갔습니다. 여기에는 역사의 법칙 같은 게 있어 보입니다. 다른 대륙은 잠자고 있는데, 유럽만이 깨어 있었거나 끊임없이 에너지가 흡수되어 역동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명이라는 강국이 있었지만, 바다를 버리고 내륙에 안주해 있었으며 명을 이어 청이라는 강한 유목 왕조가 중국을 지배했지만, 바다에 미숙한 이들 역시 내륙 확장에만 매달렸습니다. 반면, 청 왕조를 위협할 유목 왕조는 더 이상 몽고리아에 출현하지 않아 청 왕조는 더 이상의 긴장감을 유지하지 못하고 서서히 나약해져 갔습니다.
인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내려온 무굴에 의해 단일제국으로 완성되었지만, 무굴은 유목 왕조로서 바다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무굴은 인도 남부의 힌두왕조가 만들어 놓은 무역로조차 지키지 못하고 바다를 멀리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계층은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투르크계 유목민이었고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종교세력은 아랍세력이고, 거기에 문화적 자존심이 남다른 페르시아인, 독립적인 여러 소수민족이 이슬람의 얼굴로 모였지만 세력확장이 멈추면서 지역 왕조들이 난립하고 종교적 갈등으로 자기들만의 리그를 벌이면서 서서히 쇠퇴했습니다.
400년간의 레콩기스타가 끝나고 새 시대를 맞이한 서유럽, 서유럽은 궁핍했고 전쟁을 하며 더욱 궁핍해졌습니다. 그나마 궁핍을 모면하게 된 건 이슬람왕조로부터 빼앗은 재물 덕이었습니다. 국토회복운동도 끝났고 더 이상 뻗쳐 나갈 곳이 마땅하지 않을 때, 그들은 바다를 택했고 결국 잭팟을 터트렸습니다.
이는 몽고리아에서 시작해 세계를 지배한 유목민의 시대가 지고, 바다를 선택한 게르마니아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 한가운데 작은 나라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이 이룩한 도시 ‘리오데자네이로’는 코파카바나 해변, 삼바축제, 코르코바도 언덕의 예수님 동상으로 널리 알려진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이며 대 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의 애환이 그대로 담긴 역사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포르투갈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적절한 시기와 현명한 선택과 실리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포르투갈의 역사에선 명분에 일희일비했던 조선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아니다 싶으면 바로 얼굴을 돌려 새로움에 미소 짓는 포르투갈, 카스틸야 왕조의 속지에서 자치권을 얻고 조금 더 힘을 키워 독립을 얻고, 스페인의 번성기에 60년간 지배를 받다가 영국과 한 팀을 이뤄 스페인을 격파하고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나폴레옹 시절에는 잠시 프랑스의 속국이 되었지만 왕실을 브라질로 옮겨 끝까지 저항했고,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확실한 독립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기까지 아무리 어려워도 영국과의 관계를 놓지 않습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 시대가 가고, 나폴레옹의 열정의 시대가 지고 결국 영국의 시대가 될 거라는 혜안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을까요…
‘조선왕 독살사건’에서 이덕일 님은 “정조가 10년을 더 살아서 그가 키운 정도전 같은 학자들이 사후에도 개혁을 지속할 수 있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아쉬움을 금치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조선의 바뀐 운명이 무엇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일본과 같은 실리적인 나라가 되었을 거라는 가정이 아닐는지요…
어쩌면 힘은 갖추되 일본같이 무모한 난동은 벌이지 않고 자중하는 조선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대서양에 영국이 융기했듯이 태평양에 조선이 일어났을까요… 역사는 가정이 필요 없지만 가정이 아쉬움과 반성을 말하기도 하니 역사의 가정에서 배울 게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가 보면, 극렬하게 식민지를 놓지 않아 식민지를 가장 늦게 독립시켰고, 노예 제도도 남들이 다 받아들이고도 한참을 머뭇거린 후에야 폐지한 포르투갈인데, 라틴아메리카에 유일하게 전쟁 없이 독립한 나라가 브라질이라는 사실에 어떤 뒷거래가 있지 않았는지 궁금해집니다.
나폴레옹의 혁명군이 포르투갈로 들이닥쳤을 때 포르투갈 왕실과 귀족 16,000명은 16대의 배에 나누어 타고 브라질의 리오로 이동했습니다. 왕실이 옮겨간 뒤로 브라질은 급속히 성장했고 포르투갈은 긴 침체를 겪었습니다. 식민지의 모든 수익이 본토로 들어가지 않고 현지 건설에 투여되었으니 리오의 성장과 포르투갈의 침체는 당연한 현상이었습니다. 리오는 사람과 부가 몰리면서 본토를 능가하는 도시로 탈바꿈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포르투갈 왕실은 리오에서 리스본으로 환궁하였습니다. 이때 포르투갈 왕인 동 주앙 6세는 아들이자 황태자인 돈 페드루에게 브라질을 통치하라며 리오에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리오는 제국의 수도에서 식민 도시로 다시 전락하게 되었고 리오는 이때부터 본국에 대한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등석 앉아있던 사람을 일반석으로 가라고 하니 불만이 없을 수 없겠죠…
리오에 불만이 쌓여갈수록 포르투갈 왕실은 돈 페드루를 옹립해 독립할지 모른다고 우려하게 되었고, 왕실에 대한 의혹이 짙어질수록 돈 페드루의 환궁을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이피랑가 강가’에 머물던 돈 페드루는 왕실로부터 환궁하지 않으면 통치권을 빼앗겠다는 마지막 편지를 받았고 동시에 브라질의 독립을 촉구하는 식민지 의회 의장 ‘조세 보나파시오’의 편지가 전달되었습니다.
돈 페드루는 두 통의 편지를 들고 마지막 결정을 고민했겠죠. 포르투갈로 돌아가도 왕이 될 테고, 브라질에 남아도 왕이 되겠지만, 브라질의 독립을 막을 수는 없다는 걸 그도 알았을 겁니다. 어느 나라의 왕이 되어야 할까요… 돈 페드루는 포르투갈 왕실에서 보낸 편지를 찢어버리며 소리쳤다고 합니다.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브라질의 독립은 그렇게 선포되었습니다.
동 주앙 6세는 미래를 보았을까요. 그는 리오를 떠나며 돈 페드루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하네요. “브라질과 포르투갈을 선택해야 한다면 브라질을 선택해라.” 나라의 안위보다 아들의 미래를 더 걱정한 모양입니다. 그런 연유로 브라질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독립하게 되었고 그 현장이 제가 걷고 있는 리오입니다.
돈 페드루가 리오에서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한 해가 1815년이고, 시몬 볼리바르가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선포한 해는 1813년, 산 마르틴이 아르헨티나를 스페인에서 독립시킨 해가 1816년인 걸 볼 때 돈 페드루의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시대의 흐름이었고 요청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의 든든한 배경이었던 영국도 스페인과 프랑스가 저물고 유일한 강국이 된 뒤로는 포르투갈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영국은 포르투갈에 돌아갈 전쟁 배상금 200만 파운드를 포르투갈에 주지 않고 브라질에 빌려줌으로써 전쟁준비를 도왔고 이를 알게 된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단념하고 말았습니다.
영국은 이번에도 꾀를 내서 두둑한 실리를 챙겼습니다. 프랑스에서 받아 포르투갈에 건네줄 전쟁 배상금을 브라질에 빌려주어 무기를 구입하게 하고, 무기를 팔아 산업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빌려준 돈은 고리를 부쳐 되받았으니 남 싸움시켜 뒤 꼴 빼먹는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브라질이 독립하고 포르투갈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들어올 돈이 안 들어오니 살림이 말이 아니게 빡빡해지고. 생활고를 못 견디고 200만 명이나 되는 포르투갈 국민이 포르투갈을 포기하고 브라질로 이주했습니다.
인구가 줄어든 포르투갈은 더 쪼그라들었고 브라질은 이민자들이 유입되며 새로운 성장이 시작되었습니다. 기회의 땅이 된 브라질에는 포르투갈 사람만이 아니고 노예로 들어오는 아프리카 흑인, 유럽 각지에서 유입된 백인, 계약 노동자로 들어온 중국계, 동양의 원주민과 공존하며 새로운 인종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흑인 중 40%가 브라질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브라질은 흑인 혼혈이 많은 나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브라질만의 현상이 아니고 식민시대부터 쭉 이어온 강제이주와 이민의 후유증이며, 이로 인해 만들어진 새로운 인종탄생이었습니다.
호세 바스콘셀로스는 이런 현상을 두고 “백인, 흑인, 황인, 원주민이 섞인 우주적 인종의 탄생.”이라고 설명하며 그렇기 때문에 지구의 미래는 라틴아메리카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촌 각지로 퍼져나가는 과정에 네안데르탈인이나 크로마뇽인과 섞였고 이때 처음으로 인종의 혼합이 일어났습니다.
네안데스탈인과 크로마뇽인이 도태되고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유일한 인류가 된 이후 호모 사피엔스는 지역에 고립된 체 약 10만 년 전 동안 독자적으로 진화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인종의 혼합은 약 10만 년 전 일어난 인종의 혼합 이후 가장 거대한 인종혼합사건입니다. 너무나 다양하고 거대해서 호세 바스콘셀로스의 표현대로 우주적 인종의 탄생이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정부는 창조된 인종을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습니다.
인종분류는 크게 보면 백인과 인디오의 결합을 메스티소(Mestizo), 백인과 흑인의 결합을 물라토(Mulato), 인디오와 흑인을 결함은 잠보(Zambo)로 분류하고 그들 간의 결합에 의해 탄생한 아이들을 다시 분류했는데, ‘라틴 아메리카의 어제와 오늘’에서 분류한 표에는 16개의 인종을 분류해 표기하고 있으나 인종분류는 40여 종이 넘었다고 합니다.
2차 분류표에 따르면 메스티조와 원주민이 섞이면 카스티조, 물라토와 백인이 섞이면 모리스코, 모리스코와 백인이 섞이면 알비노, 알비노와 백인이 섞이면 토르나아트라스, 원주민과 토르나아트라스가 섞이면 로보, 로보와 원주민이 섞이면 잠비아…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열의 기준은 백인의 피가 얼마나 섞였는가 입니다. 카스티조와 백인의 결합으로 나온 아이를 백인으로 받아들이는 걸 보면 50% 이상 백인 피가 섞이면 백인으로 인정한 듯합니다 어느 정도의 피를 이어받았느냐에 따라 다시 세분화했는데, 흑인 피가 1/4 섞인 백인을 하꾸아르떼론(Cuarteron), 흑인 피가 1/8 섞인 백인을 옥또론(Octoron)으로 분류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재미난 게 꾸아르테론과 물라토 사이의 혼혈을 ‘뗀떼넬아이레(Tentenelaire)’ 즉 ‘허공에 걸려 있는’ 이란 뜻을 가진 명칭을 썼다는 데, 인종분류를 담당한 관리가 난처했던 모양입니다.
사랑은 인종을 가리지 않고 불만 끄면 이루어지는 데, 그걸 문화의 잣대로 나누려니 세대가 이어질수록 난감하기만 합니다. 제가 라틴아메리카 여행을 하면서 만난 안내인들은 다양한 혈연관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피의 계보를 말하기 보다 호세 바스콘셀로스가 표현했듯이 우주적인 인종으로 자신을 받아들인 듯합니다. 백인, 흑인, 황인 만이 구분이 전부일 수는 없으니까요.
현재는 물론이고 식민지시대 인종정책을 봐도 라틴아메리카는 포용적입니다. 순수혈통 백인이 인종의 중심이던 시대 미국은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튀면 흑인으로 분류했다고 하는데, 라틴아메리카는 백인의 피가 50%가 넘으면 백인으로 보았으니 라틴아메리카가 포용적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처음 도착한 날 아메리카는 새로운 인종으로 다시 태어나기 시작한 날로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라틴아메리카에는 콜럼버스가 첫발을 디딘 10월 12일을 ‘인종의 날(Dia de la Raza)’로 정해 기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확히 따지자면 말린체가 코르데스의 아기를 낳은 날이 인종의 날이어야 하지 않은지요, 그녀는 무어라 외치며 첫 혼혈아를 낳았을까요…
코파카바나나 이파네마 해변은 허름한 호텔도 $300이 넘고. 그것도 삼바 축제 기간엔 5일 이상 예약해야만 방을 준다고 하니 해안가에 자리를 잡고 다양한 피가 흐르는 브라질 미녀를 구경하겠다던 저의 계획은 도착하는 첫날부터 좌절되었습니다.
다른 곳에 잠자리를 잡아둔 것은 비싼 호텔비 때문이기도 하지만 안내자로 나온 모니카(Monica)의 첫 마디가 기를 꺾었습니다. “가방에는 쓰레기만 넣고 다니세요. 그리고 누군가 가방을 잡아당기면 저항하지 말고 주세요.”
브라질은 총기사고로 일 년에 죽는 사람이 3만 5천 명에 달한다고 하니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 더 많은 숫자입니다. 전쟁터보다 더 많은 사람이 총에 맞아 사망하는 나라가 어떻게 가능한가요, 전쟁은 허가받고 사람을 상대로 총을 쏘는데, 브라질은 이면의 전쟁 중인가요?
코파카바나와 이파네마 해변을 걷고 술을 한잔 하겠다던 꿈은 숫자 앞에서 좌절되었고, 아름답다고 소문난 해변의 소녀를 사진으로만 즐길 뿐입니다. 그래도 저녁을 먹어야 하지 않느냐고 모니카를 달래 보나노바(Bossa Nova· 포르투갈어로 ‘새로운 경향’)의 메카로 불리는 식당을 향합니다.
제가 태어난 해인 1962년 톰 조빔(Tom Jobom)과 모라에스(Moraes)는 이파네마의 작은 식당에서 술을 마시다가 지나가는 15세 소녀를 보고 눈을 빼앗겼습니다.
제가 보고자 한 우주적 인종을 본 모양입니다. 그녀에 대한 연정은 두 젊은이를 들뜨게 했고 두 청년은 그녀를 생각하며 ‘이파네마의 소녀(Garota de Ipanema)’를 작곡해 세상에 보사노바 음악과 이파네마를 알렸습니다.
당시 식당의 이름은 ‘벨로소’라고 했다는 데, 음악이 알려지며 현재 식당은 ‘이파네마의 소녀(Garota de Ipanema)’로 불리고 있습니다.
더 재미난 건 식당의 주인이 곡의 주인공인 이파네마의 소녀라고 합니다. 1962년에 15세면 지금은 70살이 다된 나이지만 영감을 준 매력이 어딘가에 살아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주인장을 찾으니 15세의 소녀는 이제 없다는군요…
보사노바는 흔히 말하는 뉴에이지(New Age) 음악입니다. ‘삼바’에 모던재즈가 가미된 새로운 장르로 삼바의 강한 비트를 없애고 속도감을 느리게 하면서 멜로디 화음에 반음계를 사용하여 부딪히는 선율을 만들어내는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느려지는 신파조의 가사가 속삭이는 듯 이야기하는 노래로 사랑받는다고 합니다.
보사노바 음악이 만들어진 식당 ‘이파네마의 소녀’는 성지처럼 방문객으로 북적거립니다. 예약하였건만 앉을 자리는 쉽게 나오지 않고 겨우 앉은 자리도 뒷사람과 등이 맞닿을 만큼 비좁습니다. 그걸 열기라고 하죠… 사람의 열기가 느껴지는 음악이 보사노바인 듯합니다.
익숙한 음식을 시키고 마지막으로 노예의 음식으로 알려진 페이조아다(Feijoada)를 시켰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은 배고픔에 시달렸습니다. 그들은 농장주들이 버린 고기를 주워 붉은 콩에 넣고 끓여 먹으며 허기를 달랬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음식이라서 노예의 음식으로 불리지만 미군 부대에서 나온 잔반을 모아 끓여 먹었던 우리의 입맛이 부대찌개로 옮겨 갔듯이 양질의 스테이크, 닭고기, 생선이 가득 들어간 ‘페이조아다’는 사랑을 듬뿍 받는 브라질 최고의 음식이 되었습니다. 음식의 양이 많아 셋이라면 두 가지만 시켜도 될듯합니다.
저녁을 먹고 나온 거리는 온통 흥청거리는 젊은이들뿐 입니다. 오늘은 삼바축제 전야제가 열리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7시 전에 호텔에 들어가야 한다고 모니카가 주의 준 걸 깜박하였습니다. 시간은 7시 15분,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차가 다니지를 않습니다.
식당이 위치한 아파네마 해변과 코파카반 해변은 연결되어 있고 20여 분만 걸으면 도착할 수 있기 때문에 차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을 헤치며 도로를 걷는데, 해변에서 열광적인 리듬이 흘러나옵니다. 저는 저기서 뭘 하는 거지 호기심에 한 두 발자국을 옮긴 거 같은데, 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해안 모래사장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저기 뭐지, 그런 호기심은 제 발길을 소리의 진원지로 끌어들였고 저는 어느 틈엔가 사람들 사이에 묻혀 버렸습니다. 사람들에 쓸려 이리저리 밀리는 모래사장, 서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앞사람의 허리춤을 잡고 일렬로 사람들을 헤치며 도로로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그런데 주머니에 있어야 할 핸드폰, 가방에 있어야 할 지갑은 온데간데없습니다.
동행한 한 분은 $2,700이 든 지갑이 사라졌고, 누구는 배낭에 넣어 놓은 카메라가 사라졌고… 쓰레기만 넣어 다닌다는 모니카의 말이 실감 나는 순간입니다. 저는 주변을 돌아보고서야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습니다.
젊은 친구들은 거의 반바지에 반팔이거나 웃통을 벗고 있고 한 손에 술, 다른 한 손에는 술을 사 마실 소액 지폐 몇 장 든 게 전부입니다. 카메라를 가진 사람도 가방이나 지갑을 가진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전국의 선수들은 다 모인다는 삼바축제인데, 여행자 차림으로 저 안을 휘저었으니, 꼴 좋게 당한 것이죠, 그런데 저희는 의도한 게 아니었습니다. 어떤 에너지에 의해 끌려갔고 어떤 힘에 의해 퉁겨져 나왔습니다. 그 힘, 삼바라고 불리는 엄청난 에너지, 리오에서의 첫날 삼바는 그렇게 저와 만났습니다.
최근 세계 8대 불가사의에 꼽혔다는 거대 예수상을 보기 위해 코르코바도 언덕에 오르고, 거대한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서야 왜 리우가 세계 3대 미항에 들어가는지 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큰돈을 들여 케이블카를 두 번이나 타고 바위산을 오르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신상이 없고 건축방식이 특이해서 유명하다는 말에 속아 성당에도 가보고 그렇게 정해진 관광을 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코르코바도 언덕의 예수상은 인간이 만든 거대한 석상일 뿐, 특별한 감흥을 느낄 수 없었고 바위산에 올랐건만 안개가 껴서 리오가 미항이라는 말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성단은 건축이 특이하고 스테인드글라스가 표현하는 십자가의 분위기가 특별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았던 건 코파카바나 해변의 카페에 앉아 우주적 미인들을 훔쳐본 것이었습니다. 그런 미인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멋 삼바 쇼를 관람하러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삼바의 기원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혹독한 노동의 고통을 잊으려고 가락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율동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니 우리의 노동요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집단으로 노래하면서 일을 하면 지루함과 육체적 피로를 잊을 수 있고 노동의 생산성도 높아지니 농장주들도 삼바를 독려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발전한 삼바는 흑인의 특유한 무거운 바운스, 유연함과 순발력을 필요로 하는 엉덩이 춤(Hip Movement)이 주를 이루었고 여기에 내츄럴 롤(Natural Roll)이나 리벌스 턴(reverse turn) 등 포르투갈의 댄스가 결합된 형태라고 합니다.
삼바축제는 가톨릭 4 순절 직전에 3일에서 1주일간에 걸쳐 열리기 때문에 축제 위원회에서 매년 축제일을 공표한다고 합니다. 삼바를 보러 갈까요? 아니면 삼바 기간을 피해갈까요… 미리 확인해야 하는 것을 저는 아무것도 모른 체 와서 엄청난 에너지를 받고 그 대가로 돈을 톡톡히 지불하고 가니 이래저래 여행이란 공짜가 없는가 봅니다.
그래도 삼바 춤 한번 못 보고 라틴아메리카를 떠나기는 아쉬워 삼바 공연장을 찾아갔습니다. 해안의 열기는 어디 갔는지, 극장은 현란하게 몸을 흔드는 댄서와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나팔 소리, 숨죽이고 바라보는 관광객이 있을 뿐 열기는 없습니다.
축제는 열기를 느낄 수 있을 때 축제인가 봅니다. 삼바는 브라질 사람들의 축제죠. 여행객의 축제는 아닌 것이죠. 얼떨결에 빨려 들어갔지만 아파네마의 열기는 돈이 아깝지 않은 그날 밤의 해프닝이었던 거 같습니다.
브라질을 대하며 의문점 하나 남아 있습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지구를 절반씩 나눈 포르투갈에게 아메리카 대륙은 권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브라질의 면적은 남아메리카의 절반에 해당됩니다.
아프리카를 다 먹고 아시아까지 독점적 권리를 갖고 있으면서 남아메리카의 절반을 차지했으니 땅으로 보면 포르투갈의 대단한 승리입니다. 스페인왕실은 왜 바보같이 보고만 있었을까요…
브라질은 금이 나오는 땅도, 은이 나오는 땅도 아니고 문명이 자리 잡은 개화된 땅도 아닙니다. 통치하기에도 버거운 면적입니다. 스페인은 안데스 너머 대지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포르투갈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200만의 인구로는 아프리카와 동방의 무역을 감당하기도 바쁘기만 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포르투갈에 신의 선물이 있었습니다.
브라질 해안에 거주하는 투피족은 활동적인 전투집단인데 이 부족이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포르투갈의 탐험대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들이 참여하면서 포르투갈은 내륙 깊숙이 탐험을 이어갈 수 있었고, 브라질의 땅이 아메리카의 절반에 이르는 큰 땅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탐험대는 금, 은이 아니라 붉은 염료를 뽑아내는 나무인 파우 브라질(Pau-Brazil)만 가득 싣고 돌아왔고 이에 실망한 포르투갈 왕실은 아마존을 귀족들에게 나누어주고 방치했습니다. 그렇게 방치된 땅이 지금은 세계의 산소공장이 되었으니 큰 보배일 밖에요… 그때 금, 은이 나왔다면 정글을 헤치고 금을 캐간다고 남아나는 게 없었을 테고 무수히 많은 사람도 무수히 아마존에서 죽어 나갔겠죠…
브라질의 국명이 ‘파우 브라질’을 채취하는 사람을 일컫는 ‘브라질레이루(Brasileiro)’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브라질을 떠나기 전에 나무를 꼭 찾아봐야겠습니다. 모니카는 철망 넘어 작은 나무를 가리키며 ‘파사 브라질’이라고 하는데, 특징 없이 초라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파우 브라질은 정글에 알맞은 크고 강한 나무입니다. 다 자란 나무는 길이가 8~10m, 둘레가 1m에 달한다고 하니 아마존에서도 밀리지 않는 강한 나무입니다. 정글에선 약한 나무는 살아남지 못하죠. 키다리 경쟁을 해야 하니까요…
저녁을 슈라스코(브라질식 바비큐) 전문 식당에서 배불리 먹고 카페에 앉아 집으로 돌아갈 마음을 달랩니다. 80일간의 여행이 끝나는 마지막 날입니다. 내일이면 집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야 하는데, 마음은 여전히 허기지기만 합니다.
더더군다나 여행길의 마지막이 브라질이라서 착잡합니다. 브라질은 룰라의 업적이 빛나는 나라입니다. 룰라는 모든 문제를 해결한 줄 알았는데, 브라질은 여전히 사람이 가장 많이 총에 맞아 죽고 배고프고 헐벗은 사람이 특정 지역에 무리 지어 살아야만 하는 갈등의 땅이자 후진의 땅입니다.
어찌 된 건가요. 룰라의 화려한 수치는 어디 갔나요. 룰라의 후계자들은 룰라의 정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책이 잘못 된 건가요? 빚만 잔뜩 지고 파산하게 될 거라는 소로스의 장담이 이제 맞아가나요. 2015년 대한민국도 복지논란으로 어수선합니다. 좀 기다리면 나아질까요…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은 곡물 값이 떨어지며 주저앉았습니다. 아르헨티나는 2015년에도 모라토리엄에 직면해 있고 아르헨티나 돈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파타고니아 차량회사에 $3,200을 카드로 결제했습니다. 그런데 청구액이 450만 원이 넘게 나왔습니다. 너무 당황스러워 차량회사에 문의하니 카드는 공식환율로 계산되고 송금은 달러로 받기 때문이라는 답이 옵니다. 카드를 취소하고 송금하겠다고 하니 이제는 은행이 막무가내입니다. 한번 들어온 결제는 취소를 못 시켜주겠다고 버텨서 결국 카드회사에 이의를 신청하고, 차량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문건을 만들어 보내고 나서야 해결될 정도로 신뢰는 바닥입니다.
베네수엘라의 경우 1,000유로를 환전한 여행객이 그 돈을 침대에 펼쳐 놓았는데, 침대의 반을 덮은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 코웃음을 치게 합니다. 제 가방에 남은 두툼한 베네수엘라 돈은 그래 봐야 한 끼니 식사값인 거죠.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보고 느낀 건 아름다운 이야기와 멋진 사건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현실은 여전히 불편한 진실로 가득할 뿐입니다. 이달고, 볼리바르, 산 마르틴의 꿈이 실현 되었습니다. 그러나 체 게바라, 카스트로, 아옌데, 후안 페론, 룰라가 꿈꾼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는지 그때나 지금이나 갈등의 크기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모니카는 리오에 총기사고가 많은 이유는 직업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직업이 없으니 소득이 없고, 평생 벌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대에 사는 젊은이들, 룰라, 아옌데, 후안 페론, 차베스, 카스트로… 이들은 분배와 하위계층의 소득을 높이는 데 정책의 우선을 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주의 정권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왜 사회주의를 표방한 좌파 정권은 국민의 외면을 받고 말았을까요. 착취의 땅에서 정의를 실현하려는 사회주의 이념은 혁명과 변혁시대의 꽃이었고 군사독재의 대안이었습니다. 그리고 좌파는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평가는 구호처럼 수려하지만은 않습니다.
좌파는 화려했지만 무능했고, 그들도 역시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나누어 갖는 데는 성공했지만, 더 많은 걸 만들어 내는 데는 부족했습니다. 이제 라틴아메리카는 더 많은 걸 만들어 보라고 우파를 선택했습니다.
1950~60년대 좌파정권의 좌절은 군부 쿠데타가 원인이었습니다. 2,000년 좌파정권의 좌절은 국민의 선택이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 불어나고 있는 보수정권의 재등장, 먹고 살기 힘든 시대의 시대적 요청은 아닌가요.
유대인의 동선이 선진국의 경로 내지 자본증식의 과정이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유대인이 스페인에서 쫓겨나며 스페인은 쇠락하고 네덜란드에 자본주의가 번창했습니다.
네덜란드의 윌리엄 3세는 영국의 왕을 겸임하였기 때문에 윌리엄 3세 때 네덜란드의 유대인들이 영국으로 대거 이주했습니다. 그 결과 네덜란드는 프랑스, 영국의 침공을 받아 무너지고 영국이 세계의 중심에 우뚝 올라섰습니다.
미국이 독립하며 유대인들은 미국으로 서서히 대거 이주를 시작했고, 세계 대전 후에 미국은 최강국이 되었습니다. 왜 유대인은 라틴아메리카로 자리를 옮기지 않나요… 미국 땅을 떠나 라틴아메리카로 몰려오면 라틴아메리카의 삶이 나아질 텐데요… 기왕 역사에 봉사하는 일, 그만 옮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태평양은 건너 한반도에도 한 100년 머물다 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역사는 먹고사는 문제를 가장 아닌 척 풀어내는 서사시가 아닐까요. 라틴아메리카에서 펼쳐진 역사의 흐름을 추적해간 80일간의 여행에서 저는 그거 하나 깨우친 듯합니다. 그만 필기 노트를 접어야겠습니다. 돌아가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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