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로 돌아오니 어느새 12일이 휙 지나갔습니다. 이제 수단을 건너띄고 에티오피아로 향하기 전 이집트의 마지막 여정을 보냅니다. 피라미드로 시작 된 나일강 역사투어는 머나먼 시간을 넘나든 시간여행이었습니다. 카이로는 지난 시대의 영광을 같이하지는 못했습니다. 카이로는 9세기 아랍이 이집트에 진출하며 건설한 군사요새로 시작됩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지정한 5대 교구로 북아프리카의 중심지는 그 이전까지는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이집트의 역사를 보면 초기의 중심지는 카이로에 멀지 않은 멤피스였고 알렉산더가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며 이집트의 수도가 됩니다. 카이로가 다시 이집트뿐 아니라 북아프리카의 중심이된건 지중해시대가 끝나고 다시 나일강시대로 돌아갔음을 의미합니다.
올드시티는 카이로의 문화적 공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역입니다. 이집트의 카톨릭인 콥트교는 니케아 공회이후 로마 카톨릭과 갈라져 독자의 길을 갑니다. 에티오피아 정교는 다르지만 그리스 정교와는 같은 맥락입니다. 올드시티는 콥트교라는 이집트 정교의 성당과 이슬람 유적인 모스크, 유태교 시니고그 등이 공존합니다. 두 종교는 서로 배척하지 않고 공존했다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올드 카이로 지구의 콥트교 성당을 들어서니 놀라운 일이 한 둘이 아닙니다. 지붕이나 기둥의 양식이 아라베스크 양식입니다. 반면 성당 안의 창문이나 벽은 모자이크와 성화 등 카톨릭의 전통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외부치장은 익숙한 전통장식과 아랍풍을 받아들이고 내부는 카톨릭의 전통을 유지합니다. 물론 서유럽에서 보는 대성당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세련미나 규모도 떨어집니다. 도리어 러시아의 정교에서 느낀 분위기와 흡사합니다. 교회에서 나오니 콥트교의 Bob(종교 리더로 카톨릭의 뽀뽀)와 로마 카톨릭의 교황이 같이 찍은 사진을 팝니다.
남아메리카 예수회에서 나온 현재 교황의 횡보에 세계여론은 흥분과 우려를 보입니다. 카톨릭을 넘어 다른 종교와의 화해와 소통을 보여주고 카톨릭의 역할을 종교의 울타리에서 사회의 울타리로 가져가기도 하며 가진 자의 종교가 아니라 없는 자의 종교임을 강조하는 현 교황은 역대교황 중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전하는 분으로 인정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교회는 종종 권력을 쫓다 스스로 권력이 되었다는 비난을 받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한 장의 사진을 사며 역사적 전환점에서 시대에 가장 알맞은 분이 교황이 되신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이드는 좁은 골목을 돌아 작은 교회로 안내합니다. 겉은 교인인데 안은 시니고그입니다. 이 교회는 원래 콥트교회였으나 18세기 교인들이 유태교인들에게 팔았다고 합니다. 교회 안은 다비드의 별과 토라(유태교 성경)만 있을 뿐 십자가는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슬람은 유대교와 많은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슬람의 모스크에도 메카의 방향과 천국의 문을 상징하는 반원만이 있을 뿐입니다. 별과 방향, 둘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면을 가진 것까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후에는 이집트 국립박물관을 찾아갑니다. 4시 30분에 문을 닫기 때문에 서둘렀지만 2시간 밖에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박물관은 몇 달을 보아도 다 못 볼 정도로 많은 유물을 전시합니다. 그래서 많이 보기보다 보려고 하는 걸 정해 하나를 깊이 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목표는 로제타 스톤과 투탕카멘스입니다.
먼저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로제타 스톤의 복제본이 저를 맞이합니다. 이집트 고대문자인 히에로그라딕과 이집트 민간 문자인 헤라틱 그리고 콥트문자로 새겨진 비문은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략해 3년간 머물다 돌아갈 때 가져간 비문으로 그 후 프랑스의 학자인 참피레온에 의해 해독됨으로써 이집트학이 시작된 역사적인 돌판입니다.
당시까지 콥트문자는 로마시대를 지나 중세를 거쳐 근세까지 온전히 이어져왔으므로 알려진 상태였습니다. 참피레온 곱트문자를 기반으로 한 단순한 구조를 가진 고대 문자가 되 살아남으로써 베일에 싸인 무덤벽화와 고대문서들이 해독되었고 이집트의 찬란한 고대문명이 되살아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런 멋진 역사적 사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자의 해독입니다. 이란 중남부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에 가면 다리우스 1세의 무덤이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도굴을 우려하기는 다리우스 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절벽에 굴을 뚫고 그 안에 휴식처를 만들었지만 도굴꾼을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위대한 업적은 무덤 속 금은보화가 아닙니다. 무덤 옆 절벽에 새겨놓은 다리우스의 업적을 기린 비문입니다. 다리우스는 이 절벽에 고대 수메르 문자, 고대 페르시안 문자, 그리스 문자로 새겨 넣었습니다. 인류가 이미 알고 있는 그리스 문자를 기반으로해서 수메르 문자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고 숨겨진 지난 날의 사실이 추측이 아닌 현실로 하나 둘 규명되었습니다.
로제타 스톤을 지나 2층의 투탕카멘스관을 찾아갑니다. 4개의 목관을 비롯해 너무나 유명한 황금마스크, 그 외 생전에 사용한 의자, 마차, 침대, 각종 장식류, 장례에 사용된 용구들, 내세에서 사용할 물건까지 다양한 부장품 뿐 아니라 심지어 장갑과 신발까지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을 두었습니다. 발굴 당시의 사진을 보니 작은 무덤에 창고같이 투탕카멘과 연관된 모든 물건을 차곡차곡 쌓아두었습니다.
9살에 파라오가 되어 19세에 죽었다는 소년은 내세에서도 영광스럽게 살았을까요? 미라를 장식한 관을 보니 몸을 치장한 황금 혁띠와 목에 걸었을 부채모양의 목걸이 장식이외에도 파라오의 상징인 막대기와 천국의 열쇠가 있습니다. 오리시스가 심장이 무겁다고 천국행 티켓을 안주면 그 열쇠로 열고 들어가라는 뜻이었나봅니다.
박물관에서 쫓기듯 나오면서 나일강 여행을 끝냅니다. 이집트 여행은 아직도 많은 곳이 빠졌습니다. 피라미드의 원조인 멤피스도 가봐야하고 알렉산더 대왕이 세우고 클레오파트라가 마무리한 알렉산드리아도 가봐야하고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시네산도 가봐야하고 홍해의 작은 마을도 가봐야 하지만 이만 이집트를 떠납니다. 하나쯤 남겨 놓아야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군요. 그래서 이집트는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 여행기는 '아프리카, 낯선 행성으로의 여행'(채경석 지음, 계란후라이, 2014)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