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디오피아를 떠난 비행기는 다르에살람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15분을 날아 잔지바르에 내려놓습니다. 제트비행기는 거리가 짧아 비행고도에 도달하지도 않은 듯 합니다. 바로 착륙해야 하니까요. 잔지바르에 내리니 바다의 짠 바람과 열기가 새로운 땅에 왔음을 알립니다. 차를 타고 스톤시티의 작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 앤틱한 건물 앞에 차가 섭니다. 옛날 귀족이거나 왕족의 집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고풍스런 집의 흰색벽이 높고 두터워 보입니다.
잔지바르는 더위의 영향을 덜 받기 위해 대부분의 벽이 흰색인데, 산호모래와 석회를 섞어 벽을 바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더위를 막는 효과가 크다고 합니다. 벽에 걸린 두터운 나무 문에는 철심이 조밀하게 박혀있는데 철심을 문에 박는 건 인도의 영향이라고 합니다. 코끼리가 건기에 갈증이 나면 문을 밀고 집 안으로 들어와 물을 먹으려 하는데 그러다 보면 물건도 상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코끼리가 들어오지 못하게 대문에 철심을 박았답니다. 그런데 잔지바르에는 코끼리가 없다지요. 인도인들이 정착하며 하나, 둘 문에 철심을 박으니까 너도나도 따라한것입니다. 유행이 문화를 만들어낸 경우입니다.
잔지바르 중심지를 스톤시티로 부르는 건 건물들을 석회암 블록으로 지어서입니다. 거기에 아랍양식의 창문과 문, 인도풍의 소소한 장식, 포르투칼 양식의 2층 테라스 등 다양한 문화가 복합적으로 스며있습니다. 그래서 유네스코지정 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골목이 좁고 마주한 건물의 벽이 높은 건 폐쇄적인 속성이기도 합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보니 단단한 건물 밖과 달리 건물 안은 다른 세상입니다. 넓은 뜰과 긴 회랑, 거실, 심지어 수영장까지 내부는 공간이 여유롭습니다.
우리가 묵은 호텔도 고풍스러운 소품들로 장식된 긴 회랑을 지나고 수영장을 건너야 방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올 만큼 대문 안의 세상은 훌륭했습니다. 중국 운남성 여강 고성 안에 자리잡은 금난춘이라는 유일한 호텔이 있습니다. 옛 왕족의 집을 개조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집도 좁은 골목에 비해 집안은 시원스레 넓은 마당을 가진 2층 구조였습니다. 안과 밖이 다른 이유는 가진 것을 숨기려는 것일까요? 여하튼 3일밤을 보내야 하는 호텔에 만족하며 잔지바르에서의 첫 날을 보냈습니다.
잔지바르는 페르시아가 개척한 무역 중심지입니다. 바스라항을 떠나 호르무즈 해협 여기저기를 기웃거린 신밧트의 모험정신이 여기까지 왔었나봅니다. 신기하고 별난 호기심은 새로운 세상으로 이끄는 에너지가 아닐까요? 전설에 의하면 쥐가 궁을 갉아먹는 꿈을 꾼 페르시아 왕자가 새로운 궁터를 찾아 바다멀리 새로운 세상을 항해하다 675년에 찾아낸 게 잔지바르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헛된 설명이구요. 동아프리카 내륙과 무역을 화려한 페르시아가 그 무역기지로 개발한 곳이 잔지바르입니다. 첫 삽을 뜬거지요. 그 후 잔지바르는 페르시아를 대신한 아랍의 술탄들이 지배하는 소국이 되는데, 주로 오만의 지방 술탄이 지배하는 왕국입니다.
향료투어를 출발했는데 외곽의 할렘부터 방문합니다. 잔지바르 왕국의 아랍계인 3번째 술탄인 바하쉬 빈 사이드의 할렘으로, 그는 정부인 이외 99명의 여자를 후실로 두어 이곳에 머무르게 했다고 합니다. 여자를 쉽게 부르거나 자기가 놀러오기 좋게 할렘을 바닷가 어촌에 지었다는군요. 하여튼 그가 남긴 유적을 둘러보며 대단한 향락에 혀가 내둘립니다. 본인은 스톤시티에 머물며 필요하면 여자를 부르거나 스스로 배를 타고 이곳으로 왔을텐데, 건물에는 화장실이 5개나 됩니다.
이유는 매일 다른 화장실에서 변을 봤다나요. 5일은 여기서 보고 남은 이틀은 스톤시티 자신의 궁에서 봤을까요? 많은 기둥이 떠받치는 건물에는 99개의 방이 있었다는 데, 모든 여자에게 하나의 방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가 어느 방으로 들어갈지는 아무도 모르니 99명의 여자는 항상 문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졸였겠지요. 행복한 술탄의 재위기간을 보니 19세기가 끝날 때까지 그의 향락이 이어집니다.
한 명의 남자를 위해 존재하는 여자들. 세상엔 그런 예가 많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칭기즈칸은 부인이 500명이었답니다. 그의 아들 주치는 50명이었구요. 그래서 중앙아시아에 분포된 가장 많은 유전적 특징은 칭기즈칸의 DNA에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더한 남자도 있습니다. 아프리카 세네갈의 마지막 왕은 부인이 800여명이었답니다.
그는 현대적 무기를 갖춘 공화국 군대가 그의 궁을 포위하고 한 명만 부인으로 선택하고 나머지 부인들은 다 풀어주라고 하자 50명만 허락해달라고 빌었다고 합니다. 1명만을 선택하면 여자들이 너무 불쌍하다나요. 여자들도 말도 안된다며 울었다는데, 남자가 그 정도는 되야죠.
할렘을 나와 본격적인 향료투어에 들어갔습니다. 듣기만하고 보지못한 여러 향료들을 직접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으며 하나둘 배워가는 재미난 투어였습니다. 여러 재미난 향료 중 육두구(Nutmeg)라고 불리는 향료는 정신을 강하게 자극하기 때문에 여자들이 음식을 할 때 조금씩 넣어 남편에게 준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먹으면 부인이 아름답게 보여 다른 여자에게 가지 않는다는 군요. 두번째 부인을 얻지 말고 나만을 사랑해 달라는 절절한 마음이 들어간 향료입니다.
술이 없는 이슬람권에서는 축제 때 흥분제로 쓰이기도 한답니다. 저도 입에 넣고 오래 씹으니 혀가 마비된 듯 얼얼합니다. 정향(Clove)라는 향료는 기름을 짜서 쓰는데, 여자들이 남편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전신에 발라준답니다. 몸에서 나는 향기는 곧 나를 기쁘게 하고, 향은 남자를 자극하지 않았을까요?
그 외에도 후추, 붉은 바나나, 코끼리 바나나, 인도에서 수입한 샤프란까지 음식 세상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향료들이 가득합니다. 바닐라를 보면서 궁금증이 풀리기도 했습니다. 무슨 열매려니 했지만 콩같이 푸르고 긴 열매일 줄은 몰랐습니다. 레몬 그라스(Lemon grass)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주기도 했습니다. 레몬 열매로 레몬티를 만드는 줄 알았는데 레몬 그라스라는 풀을 말려 레몬티 팩을 만든답니다. 제가 알고 있었던 티는 레몬 에이드인것이지요. 그렇게 새로운 상식을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재미난 오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궁금증이 생깁니다. 노예무역으로 번성한 잔지바르에 왜 향료잔치죠? 노예무역은 19세기에 들어서 서서히 무역규모가 줄어들다가 급기야 유럽은 노예무역을 법으로 금지시킵니다. 아주 잘한 일이지만 이로인해 경제적 피해를 본 잔지바르 술탄은 99명이나 되는 여자를 지키려면 다른 수입원이 필요했겠지요. 그래서 향료무역이 활성화됩니다. 우리가 방문한 농장도 그 때부터 개발된 유서 깊은 농장이었습니다. 스톤시티로 돌아와 스톤시티투어를 하고 프리즌 아일랜드(Prison island)를 방문했습니다.
스톤시티투어를 하며 노예문제에 대해 경건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노예를 묶어두었다는 프리즌아일랜드는 유원지로 바뀌어져있고 인도양의 맑은 물과 산호섬의 에메랄드빛 푸르름이 가슴을 시원하게 해서 밝고 행복한 바캉스여행이었습니다. 흔히 노예문제는 신석기시대 농업혁명 이후 줄곧 있어왔다고 합니다. 수렵시대에는 노예란 없고 협동과 공동 분배의 공산주의 시대였지만 농업이 시작되며 저장이란게 생기고 저장을 하기 시작하며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생기고,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지배하며 계급과 노예제도가 생겨납니다. 그리스나 로마, 고대 이집트에도 노예는 일반화되었지만 혹독하지 않았고 공을 쌓거나 주인의 시혜에 의해 시민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슬람권에서는 도리어 노예의 특권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보입니다. 노예는 힘있는 주인이나 술탄에 복속되어 군인이 되거나 특정한 업무를 전담했으며, 사회적으로 성공해 재상이나 장군 등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엄마들은 자식이 노예로 팔려가게끔 노예상인에게 로비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슬람권의 노예는 아프리카보다 주로 유럽남부, 그 중에서도 발칸의 기독교 어린이나 중앙아시아의 투르크 어린이를 노예로 사들였습니다. 이들은 어릴 때 끌려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집단적으로 성장해 강한 연대의식과 충성심을 가집니다. 이들은 지배자였던 주인이 죽으면 그 뒤를 이어 정권을 잡기도 해서 이집트의 맘묵조,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나조, 북인도의 노예왕조 등 여러 왕조를 엽니다. 다만 특이한 건 부자 상속이 아니라 정통성이 없기 때문에 세력이 약해지면 다른 권력자가 정권을 잡는 구조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고려 무인정권시대에 노예에 가까운 백정출신이 정권을 잡은 적도 있으니 우리도 노예왕조의 역사를 가졌다고 볼 수 있을까요? 하여튼 오스만이 이슬람권을 지배하게 된 힘도 발칸의 기독교 어린이들을 키워 군의 주축으로 만든 예리체니라는 특수부대의 힘이 컸답니다. 그러고보면 고대나 중세의 노예란 도움을 주는 가족구성원이었습니다. 받아들인 식구이자 생활의 동반자라고 봐야합니다. 그런데 서부 유럽이 노예무역에 끼어들며 사람이 상품화되며 새로운 시장이 열립니다.
즉 아랍인에 의해 오래 전부터 행해지던 아프리카 노예무역은 포르투칼, 영국이 합류하며 대규모로 이루어집니다. 16세기부터 시작된 노예무역은 당시 경제환경의 산물인데, 유럽에서는 담배와 설탕 등이 값비싸게 팔렸기 때문에 신대륙에서는 유럽에 필요한 1차 농산물을 공급할 대단위 농장이 개발되었습니다. 하지만 원주민인 인디오의 인구감소로 노동력이 무척이나 부족했습니다.
그 시기 남아메리카 선교사인 라스카사스가 혹독한 노동에 죽어가는 인디오들을 불쌍하게 여겨 건강한 아프리카 흑인을 농장에서 쓰면 비용도 적게 들고 효율적일 뿐 아니라 불쌍한 인디오들을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해 교황청에 제안함으로써 유럽사람들이 좋아하는 인도적인 일같이 받아들여집니다. 또 혹독한 노동과 질병으로 원주민 인디오 인구가 심각하게 줄어들게 되어 인디오를 노예로 쓰지 못하는 법이 통과된 상황도 일조합니다. 임금노동자나 노예나 다를 게 없는 상황이지만 이런 상황변화가 아프리카 노예를 중심으로 신대륙과 유럽이 연결되는 삼각무역을 확대시킵니다.
노예를 가두었다는 지하 감옥에 가보니 1m밖에 안되는 높이입니다. 일어설 수도 없는 좁은 공간에 30여명을 한 방에 넣었답니다. 붙여 앉아도 30명이 들어가기 힘든 공간입니다. 그런데 그냥 앉아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쇠사슬로 묶어 한 명이 앉으면 전원이 앉아야 하고 한 명이 누우면 전원이 누워야 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편한 공간입니다. 더군다나 기가 막힌 건 방 중앙에 큰 구멍을 파 두었습니다. 그 구멍은 바로 대소변을 보는 구멍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마구자비로 대소변을 보면 가끔 와서 배설물을 치웠다고 하니 밀폐된 화장실 통에 갇혀있는 것과 같은 조건입니다. 노예로 잡혀온 사람들 중 신대륙에 무사히 도착한 사람이 1/5밖에 안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환경이 혹독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아니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벌을 노예라고 불리는 남에게 준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본 현실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인간으로 여겼다면 그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피부 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물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로마 교황청에서 인디오를 인간으로 볼건지 아닌지를 가지고 토론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간이다 아니다를 반복하다 결정적으로 인간으로 인정한 이유가 기쁠 때 웃는다는 것이었답니다. 동물은 웃지를 못한다는군요. 얼마나 오만한 일입니까? 인간이 신이 만든 존재를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로 차이를 인정하기 보다 무시해버리니 말입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기도를 했다는 넌센스야말로 코메디가 아닙니까? 분노를 삭이고 지하에서 나와 당시 노예를 거래했던 장소에 세워진 성공회교회를 찾아갑니다. 영국인 사제가 세웠다는 교회 안으로 들어가니 기둥 아래에 받쳐져 있어야 할 기초석이 기둥 위에 올려져 있습니다. 바닥이 위로 가고 위가 아래로 가는 그런 뜻이었을까요? 그런다고 용서되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리빙스턴의 심장을 묻은 자리에 난 나무로 만든 십자가 |
성당에는 노예제를 반대한 리빙스턴이 죽은 뒤 그의 심장을 묻은 자리에서 자란 나무를 잘라 만든 십자가가 있다고 합니다. 그는 2C 즉 Commence & Christianity의 신봉자로 유럽문화와 하느님의 말씀이 내륙 깊숙이 유통되는 길을 만들 때만이 노예사냥이 끝난다고 믿은 순진한 크리스찬입니다. 그의 행보로 아프리카 내륙은 속속 밝혀지고 그로인해 아프리카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집요한 식민지배와 침략이 계획되는 아이러니를 낳습니다.
물론 그가 아니라도 역사는 그리 굴러갔을 것입니다. 단지 순진한 한 명의 크리스찬의 신념이 앞당겼을 뿐이지요. 그의 노예 폐지에 대한 신념은 확고해서 여러 노예를 해방시켜주었습니다. 그 중 하인이었던 추미와 수시는 리빙스턴이 죽자 그의 심장을 꺼내 나무아래 묻고, 육신은 말려 영국으로 보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었습니다. 그의 심장을 묻은 곳에서 자란 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교회에 있다지만 사진만 보여줄 뿐 실물은 볼 수 없었습니다. 교회 밖으로 나오니 어두운 표정을 한 석상이 지하 웅덩이에 세워져있습니다. 표정 하나하나가 어둡고 슬퍼 그들의 찢어지는 절망을 느끼게 합니다.
어느 날 북을 만들 가죽을 얻으러 사냥을 나갔다가 잡혀 미국에 노예로 팔려간 킨타쿤테, 베스트 셀러인 “뿌리”의 내용입니다. 한 순간 모든 인연과 관계를 끊어야 하는 절망, 아내와 자식에게 한마디 남기지도 못하고 떠나는 슬픔과 절망을 죽음인들 막을 수 있을까요? 석상 앞에 앉아 그 때 그 위치에 돌아간 나를 상상해봅니다. 지금 나는 아프리카를 여행합니다만 일순간 납치되어 혹독한 삶을 살아야 한다면 아내에게 자식에게 한마디 남기지도 못한 채..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촉촉해집니다.
노예제도는 결국 폐지되었습니다. 그건 산업혁명으로 인간이 할 일을 기계가 대신하자 일자리를 잃은 얼굴 하얀 노동자들의 저항과 사회적 비용의 문제였습니다. 그렇게 무분별하게 들여온 검은 노예는 그들이 생산에서 만들어내는 효과보다 유지하는 데 비용이 더 들었습니다. 이젠 백인 노동자로도 충분해진 것이지요.
그래서 다시 아프리카로 돌려보냅니다. 그렇게 생겨난 나라가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입니다. 명예를 존중하는 기사답게 영국은 1839년, 프랑스는 1848년, 미국은 1863년에 노예제도를 폐지합니다. 이번에도 포르투칼이 제일 늦게 받아들입니다. 가장 먼저 시작하고 가장 늦게까지 가장 열정적으로 노예를 사냥한 나라도 포르투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는 스페인의 식민지가 하나도 없다지요.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중남미를 거의 통으로 먹은 스페인이 배가 불러 여기까지 욕심은 안냈을까요? 바로 코 앞인데 말이지요. 웃지 못할 역사적 진실이 있습니다. 대항해 시대 초기 포르투칼과 스페인이 저만큼 앞서 갔을 때 두 나라는 식민지 문제로 심한 대립을 하게 됩니다. 당시 교황인 알렉산더 6세는 지구는 넓은 데 둘이 사이 좋게 나누어 가지면 어떠냐는 생각을 한 듯합니다. 그래서 1493년 ‘엔티케테라 칙령’이라는 것을발표합니다.
즉 아프리카 서쪽 카보베르데 섬을 기점으로 동쪽은 포르투칼, 서쪽은 스페인이 차지한다는 조정안이지요. 그 안에 따르면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도 포르투칼 영역에 들어갑니다. 그래서인가요? 포르투칼은 일본까지 와서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전해주었고 임진왜란 때에 우리나라는 그 딱총에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그럼 아프리카에는 스페인 땅이 하나도 없는데 남미에는 왠 포르투칼 땅이 있냐구요? 그건 또 이렇답니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는 겁나서 내륙으로 못들어가고 사하라 이북은 오스만 투르크 땅이니까 포르투칼이 가져갈 땅이 많지 않았습니다. 반면 스페인은 잉카, 마야, 아즈텍 등 현란한 문명국을 제압하고 빼앗아오는 금덩이가 엄청났지요.
그래서 포르투칼이 다시 시비를 겁니다. 그래서 교황이 다시 이를 조정해주는 데 그게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랍니다. 즉 서쪽으로 1,000km를 이동해 다시 선을 그었는데 그만 브라질의 끝에 짤랑 걸렸답니다. 그래서 포르투칼이 브라질을 낼름 먹었다는 역사적 진실. 웃기는 이야기지요.
아메리카 인디안은 조상의 땅을 돌려달라고 미 정부에 소송을 걸어 손해배상을 받은 일이 있었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가능할까요? 누군가 노예를 사냥한 당사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다고 가정해봅니다. 영국과 미국은 노예를 그저 샀을 뿐이지요. 직접 사냥한 건 아프리카인이고 이를 뒤에서 관리하는 건 포르투칼과 아랍상인들입니다. 운영한 건 미국 등 신대륙이지만 그들은 당시의 시장 원리에 따라 비용을 지불하고 구매했으니 죄가 적게만 보입니다. 누군가 소송을 걸려고 해도 그게 쉽지 않은 게 누가 사주했건 실질적으로 노예를 잡은 건 아프리카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걸 염두해두었을까요? 영국이나 미국은 시장에서 대가를 지불하고 구매했으니 말이지요.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잔지바르에 와서 지난 시절 벌어진 잘못에 대해 사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과로 무엇이 변할까요? 아프리카는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노예무역으로 1억의 인구가 감소했고 노예사냥을 피해 주거지를 떠나 유랑함으로써 농업을 기반으로 한 산업이 초토화되었습니다.
그로인해 다른 대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에 퇴보를 계속하여 현재까지도 극도의 빈곤에 시달립니다. 미국 등 신대륙은 아프리카에서 유입된 노동력을 기반으로 산업이 급속히 발전했고 현재 세계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남의 희생을 딛고 일어선 성공이니만큼 유럽과 미국은 아프리카에 무엇이든 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하고 있나요?
아프리카 여행기는 '아프리카, 낯선 행성으로의 여행'(채경석 지음, 계란후라이, 2014)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