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들은 아프리카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지중해를 넘지 못한 그들의 사고는 상상 속 이야기를 꿈꾸었고 아프리카는 상상 저 너머의 세계였습니다. 아프리카 탐험에 적극적이었던 포르투갈 엔리케 왕자는 이슬람을 제압하기 위해 동쪽 어딘가에 있을 사제왕 요한이 다스리는 카톨릭 나라에 목메었답니다. 프레스터 죤(Prester John)이라 불리는 이 땅은 지중해를 움켜진 이슬람 세력권을 넘어 그 어딘가에 있어야 할 나라니 지금으로보면 에티오피아 즈음 아니었을까요? 마르코 폴로는 몽골 왕이라고 기술하기도 했답니다.
실질적으로 몽골이 달려와 사라센 이슬람 제국을 멸망시켰으니 유럽의 신화가 틀리지는 않은 듯 합니다. 사제왕 요한은 중세 유럽의 전설로, 그는 예수가 태어날 때 방문한 3명의 동방박사 중 한 명의 아들로 절실한 카톨릭 국가를 이끈 인물입니다. 상상 속 인물이지만 이걸 믿어버리면 특별한 힘이 생기나요?
이런 신앙적 열망이 가져온 대가가 아프리카 대륙 탐험이고 결국 희망봉에 그 의지가 닿았습니다. 바로 돌로메우디아스는 프레스터 죤은 아니지만 희망봉을 찾았고 바스코 다가마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서 향료를 가득 싣고 돌아왔으니 유럽은 결국 이슬람을 넘어 다른 세계로 진출을 시작한 셈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세상의 주인이 될 자격을 얻은 것인가 봅니다. 그런 꿈 같은 상상의 대지가 아프리카였고, 꿈을 실현시켜 준 대지가 아프리카였습니다.
이런 역사의 틀로 보면 아프리카는 식민지배와 수탈의 대지입니다. 그렇지만 그건 잠시고 한 면일 뿐이죠. 다른 면은 어떤게 있을까요? 고대문화를 꽃피운 대지입니다.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는 말 할 필요도 없구요. 짐바브웨의 거석문화, 가나, 말리의 황금왕국시대 등 아프리카의 자생적인 문명이 있었으니 아프리카는 생경하지 않은 문화의 대지입니다.
그 외에도 아프리카를 보는 시각은 다양할 듯 합니다. 원시와 빈곤의 대지, 그래서인지 끊임없이 쿠데타가 반복되는 혁명의 땅이기도 합니다. 혁명은 소수가 대수를 향해, 하부가 상부를 향해 벌어지는 변혁과정이라지만 아프리카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합니다. 개인이나 집단의 욕심으로 군대를 몰아 권력을 빼앗는 사적 혁명의 공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를 가장 알맞게 표현한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아프리카 대지는 모든 존재의 원천’ 이라 표현하고 싶습니다. 인류를 비롯해 모든 생명체와 심지어 다른 대륙마저도 아프리카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아프리카를 모르고 지구를 이야기 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아프리카 여행기의 마지막은 여행 중 지나온 각 나라에 대한 느낌을 간단한 문장으로 축약함으로써 끝내려 합니다. 첫 번째 방문국 이집트는 ‘뒤돌아보게 하는 나라’ 였습니다. 이야기도 풍부하고 건축과 문화가 우수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뒤태가 쓸쓸하여 안쓰러웠습니다.
지난 시절 너무 위대해서 이미 민족의 정기가 다 소진되었나요? 다시 일어설것 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불안정이 민족의 에너지를 얼마나 소진하고 사회적 갈등이 얼마나 많은 비용을 요구하고 국가를 후퇴시키는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두 번째 방문국 에티오피아는 ‘감동이 충만한 나라’ 였습니다. 대지가 주는 특별한 감동, 그 외에도 사람과 역사가 주는 감동도 강렬했습니다. 특히 인류가 시작된 다나킬 저지대 여행은 두고두고 남는 큰 감동이었으며, 커피 세레머니처럼 사람들이 주는 다양한 친근함까지 모든 게 잔잔합니다.
그런데 높은 문화와 역사 그리고 문자를 가진 선진민족이 왜 아프리카 최빈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프리카 구호활동이 쓸데없는 짓이라는 비판에 편들지는 않지만 지난 수 십 년의 원조와 구호활동이 아프리카를 얼마나 구제했는지 효율성을 판단해 볼 필요는 있을 거 같습니다.
세번째 방문국 탄자니아는 ‘아프리카를 아프리카답게 보여주는 나라’ 였습니다. 사바나 대지에 뛰어노는 동물들과 석양에 물드는 광활한 대지가 아프리카의 포근함과 자연성을 보여주었구요. 아프리카 특유의 문화와 전통, 고유언어를 유지하려는 노력도 특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배타적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잔지바르같은 지역은 혼합과 공존의 모형이기도 했습니다.
네번째 방문지 빅토리아 폭포는 잠비아, 짐바브웨에 걸친 ‘숨겨진 보석’ 이었습니다. 이과수 폭포가 웅장한 규모로 세상을 호령한다면 빅토리아는 신비함을 갖춘 미색 폭포입니다. 좁은 계곡 안으로 빠져드는 물줄기는 신비스런 대지의 멋스러움을 표현해 아프리카 이미지와 어울리기도 하고 상류의 잠베지 강과 초베 강은 하루의 여유를 갖기에 충분한 자연이었습니다.
다섯번째 방문국 나미비아는 ‘아프리카의 파라다이스’ 입니다. 나미브 사막의 아름다운 터치뿐만이 아니라 흑백이 공존하는 안정된 사회, 아프리카에서 보기 드물게 높은 수준의 생활환경을 가진 나라입니다. 물가도 제일 저렴하구요. 마치 백인들이 미래에 살려고 봐둔 아니 숨겨둔 땅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여섯번째 방문국인 남아공 케이프타운은 ‘만델라 정신이 피어난 또 다른 아프리카’ 였습니다. 새로운 실험과 희망이 시작되는 땅으로 미래를 차근차근 준비하는 듯 했습니다. 주인 자리를 찾은 아프리카인들이 만들어갈 아프리카의 또 다른 얼굴을 기대하게 합니다.
아프리카 종단여행을 마치며 편견이 낳은 사건 하나를 통해 아프리카가 겪어야 했던 불편한 과거를 정리해봅니다. 1789년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난 ‘사르트예 바트만’ 이라는 여성은 21살에 영국 의사에게 구매되어 영국으로 팔려갑니다. 영국 의사는 그녀의 튀어나온 엉덩이와 큰 소음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혼자만 즐긴 게 아니라 지인들에게 보여주고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다가 주변의 권유로 나중에는 도시 축제 때마다 ‘호덴토르-비너스’라는 이름으로 나체로 전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축제에서 그녀를 보며 아프리카를 생각했겠죠.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를 보는 시각은 사실 그렇게 굳어집니다. 사람으로 봤을까요? 원숭이로 봤을까요? 그녀는 그 사회에 남은 소수 휴머니스트들의 항의로 다시 프랑스 동물 상인에게 팔려가 파리에서 같은 구경거리가 됩니다.
그리고 유럽으로 건너간지 4년 후 25살에 성병으로 사망합니다. 그녀의 시신은 해부학 전문가 조르주 귀즈 남작에게 다시 팔립니다. 그가 그녀의 시신을 구매한 이유는 그녀가 사람인가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시신을 하나둘 분해해보고는 16쪽의 보고서를 냈답니다. 그의 결론은 무엇이었을까요? 남작은 그녀를 존중했는지 시신을 밀랍으로 채워 ‘인간 박물관’에 기증하였다고 합니다. 동물 박물관이 아닌 인간 박물관이죠. 참 어이없는 자만이지만 자신과 달랐을 그녀를 받아들이기가 그토록 어려웠던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처음 이곳에 왔으면 눈이 아니라 귀를 열어라" 라는 아프리카의 충고가 기억납니다. 눈은 현상을 보고 기억하고 있는 다른 무엇과의 유사점을 찾아 비교하게 되고 결론에 이르려 하죠. 하지만 귀라면 다릅니다. 먼저 들어야 하니 내가 아닌 이야기 속 주인공의 생각과 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아프리카를 종단한 저의 여행 역시 본 대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결과 여행기는 많은 왜곡과 오류가 엉켜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고착화된 편견이 정화되지 않은 채 적나라합니다. 아프리카인을 대하는 나의 태도, 나의 말투, 유럽을 여행할 때와 무엇이 다른가…되돌아 보고 반성하게 합니다. 편견은 하루아침에 바로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 번으로는 부족한 아프리카 여행이었습니다.
아프리카 여행을 끝내며 마지막 한 꼭지를 남겨놓았습니다. 마무리를 아프리카에서 끝내지 않은 건 아프리카 밖에서 아프리카를 생각해보고 싶어서입니다. 47일간의 여행으로 아프리카를 다 볼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를 느낄 수는 있었습니다. 여행기는 여행 중에 극히 개인적 감성으로 쓴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과 다르기도 하고 틀린 부분도 많을 것입니다. 가볍게 읽고 아프리카 여행을 꿈꾸시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프리카 여행기는 '아프리카, 낯선 행성으로의 여행'(채경석 지음, 계란후라이, 2014)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