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중국을 거의 식민지 수준으로 지배하던 일본은 대륙에서 완전히 물러나고 만다. 하지만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통일전쟁은 다시 한 번 중국 본토를 거대한 전쟁터로 만들게 된다. 공산당이 1949년 국민당 군대를 중국에서 몰아내고 대륙을 통일했지만 경제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중국 공산당은 1950년 이른바 항미원조(抗美援朝)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세계 최강으로 자리 매김한 미국을 적으로 만드는 우를 범하고 만다.
중국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1966년 9월 어린 홍위병이 리판우 하얼빈 시장의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있다. 리판후 시장은 혁명을 방해하려하는 혐의로 고발당했다. 당시 개는 부르조아의 상징이 돼 곳곳에서 도살됐다. |
그뿐만 아니다. 마오쩌뚱(毛澤東)은 1958년부터 1960년까지 농촌의 현실을 무시하고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을 밀어붙여서 제 2차 세계대전의 사망자보다 많은 약 3000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를 내는 참당한 실패를 경험한다.
이 운동으로 인해 마오 주석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약화된다. 그는 국가주석직에서 은퇴하고 허울 뿐인 당주석직만 맡게 된다. 요즘 정치권 용어로 따지면 이선후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혼란은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혁명은 더 많은 피와 희생을 요구한 것이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던 마오쩌뚱은 류사오치(劉小奇) 국가주석과 덩샤오핑(鄧小平) 당총서기에게 빼앗긴 권력을 찾기 위해 그들이 추진하던 개혁 정책에 반기를 든다.
이른바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을 일으킨 것이다. 물론 문혁의 명분은 거창했다. 소련이 펼치고 있는 수정주의의 폐해가 중국에서도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라고 했다. 하지만 그 내면은 권력 투쟁에 불과한 것이었다.
문화대혁명은 진시황 시절 벌어졌던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비유될 만큼 잔혹하고 비문명적이었다.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1976년에야 비로소 막을 내렸는데 당시 혁명의 광기 때문에 수많은 지식인들과 개혁주의자들이 희생당했고 시골로 추방당했다. 물론 류사오치, 덩샤오핑의 개혁 정책으로 약간의 부흥 기미를 보이던 중국 경제는 문혁 기간 동안 찬서리를 맞게 되었다.
당시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홍위병(紅衛兵) 등 주축 혁명세력들은 학문, 예술에 대한 테러를 주저없이 했다. 의식 있는 지식인이 반동이라는 이유로 살해되거나 추방을 당하고 수많은 책과 그림, 문화재가 불타고 부서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 불똥은 엉뚱하게 개에게도 튀고 말았다. 홍위병 등은 부르조아의 생활방식을 척결한다고 했는데 그들의 눈에는 개를 키우는 것은 부르조아 행태로 보였던 것 같다. 어이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 결과 중국의 많은 개들은 오로지 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곳곳에서 학살되었다. 그런데 그 테러는 개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개를 키우고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폭행과 폭언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 공안들도 홍위병들의 대단한 위세에 숨을 죽였다는 상황을 감안하면 개와 견주에 대한 이런 테러 행위는 공안들이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무법천지란 이런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