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돌봐준 주인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내던지며 구해낸 견공들의 미담이 적지 않다. 화재 현장이나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더미 속에 파묻힌 주인을 위해, 때론 들짐승과 마주치게 됐을 때 그들은 목숨을 걸고 보은한다. 충견이라 부르는 이유다. 충견들이 주인을 위해 ‘안갚음’을 한 것이다.
‘안갚음’의 ‘안’은 어떤 사실을 부정한다는 ‘아니다’의 준말이 아니다. ‘안’은 마음이다. 마음을 다해 갚는게 ‘안갚음’이다. 그리고 반대말은 ‘안받음’이다. 마음을 받는다는 뜻이 된다.
반면에 ‘앙갚음’은 ‘안갚음’과 유사한 소리를 내지만, 뜻은 하늘과 땅이다. 남에게 해를 당했을 때, 받은 만큼 그대로 되갚는 행위가 ‘앙갚음’이다. 설욕이요, 보복이다. 인류 최초의 성문법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앙갚음’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뜬금없지만, ‘안갚음’과 ‘앙갚음’을 거론하는 이유는 이렇다. 지난주 말 한 중앙 일간지에 ‘만국의 프로레타리아 동물이여 저항하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접하기 쉽지 않은 제목인데, 첫 문장이 필자를 더 놀라게 했다. ‘동물은 노동계급이다’ ‘동물들도 저항한다’. 뚱딴지같은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두 명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역사책을 뒤지는 사람이 있다로 시작한다. 이 글은 생태사학자 ‘제이슨 라이벌’을 인터뷰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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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 기사에선 동물들의 저항에 대한 여러 사례가 나온다. 그 중 하나, 샌프란시스코 동물원에서 일어난 ‘타티아나 사건’이다. “2007년 크리스마스 때였다. 젊은 친구들이 물건을 던지고 큰 소리로 약을 올리면서 호랑이를 괴롭혔다. 호랑이(타티아나)는 갑자기 울타리를 뛰어넘어 그들을 뒤쫓았다. 한명을 죽이고 두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타티아나는 출동한 경찰에 의해 살해됐다. 흥미로운 점은 다른 관람객들과 직원이 있었는데, 타티아나는 굳이 자신을 괴롭힌 젊은 친구들만 쫓아가 복수했다는 것이다. <중략> 특정 인물을 겨냥해 쫓았고, 공격했다. 일종의 복수였다.”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10여 년 전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마크 롤랜저의 ‘동물의 역습’이란 책에는 “동물도 감정이 있고, 통증이나 불쾌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인간과 생물학적 연속성에 있다”는 설명이 나온다. 동물을 해치는 행위는 부당하다는 내용이다. ‘동물의 역습’의 원제는 ‘Animals Like Us’로 동물들도 우리와 같다는 뜻이다.
지구는 인간 만이 사는 곳이 아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위한 공간이다. 이를 위해 ‘함께’라는 인식의 공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동물 학대행위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소식이 한둘이 아니다. 인간답지 못한 행동, 아니 동물보다 못한 행동이다. 결코 ‘동물의 역습’과 ‘앙갚음’은 먼 얘기가 아니다. 진지한 고민이 요구된다는 생각이다.
“사람은 어떻게 하면 착하게 살 수 있는지 배우려고 태어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항상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친절하게 대할 수 있는지를 배우려고요. 그런데, 개들은 원래 다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처럼 오랫동안 (살아)있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개그맨 양선일 씨가 제작한 자막 영상물 ‘개가 오래 살지 못하는 이유’의 한 대목이다. 과연 인간이 지혜로운가, ‘안갚음’과 ‘앙갚음’을 놓고 다시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