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가 '스트라이크'(파업)로 인해 한산합니다. 물가가 오르고 특히 기름값이 올라 살 수 없다고 정부에 항의하는 것이 스트라이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지 상점이 전부 문을 닫았고, 여행사 매니저인 텐징은 자전거 점포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제 카르둥라에서 시작되는 40km 내리막을 자전거로 다운 힐 하겠다고 이야기 하였고, 그는 자전거 점포에 미리 예약을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과 연락이 안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30분을 총총 거리다가 점포 주인이 드디어 나타났고, 자전거를 빌려 랜드로바 지붕에 얹었습니다.
레를 북에서 가로막고 있는 산맥을 넘는 것이 카르둥라 고개입니다. 지그재그로 시작되는 도로는 올라가도 끝이 없습니다. 2,000m를 올라가는 일이어서 쉽게 끝나리라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곳곳이 공사 중이라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37km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이고 조금 지나자 운전사가 차를 세웠습니다. 아직 3km전이지만 그의 반응은 여기서 카르둥라가 그리 멀지 않다고 하여 그의 말을 믿고 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는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고, 저는 속으로 ‘1km가 아니라 3km만 되도 가만 두지 않을거야.. 괜히 1km전에 내려달라고 했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이 몸을 지배한다고 했나 3km가 된다고 생각하자 걷기가 정말 싫었습니다. 다리가 천근같이 무겁고 힘이 쫙 빠지는 것이 탈진한 사람같이 축 처져갑니다. 어쩌면 고산에서 흔한 무기력증인 근육 이완 현상일지 모릅니다. 10년이 훨씬 지난 옛날 이야기지만, 대학 후배는 낭가파르밧 원정대에 참가했다가 캠프2에서 날씨가 갑자기 나빠지는 바람에 이틀간 묶여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그는 하체가 마비되어 걷지를 못했고, 구조대가 올라가 침낭에 넣어 끌고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정신은 멀쩡해서 불평을 늘어놓을 때마다 한 대씩 얻어 맞아 머리가 두 개만큼 커졌다나 어쨌다나.. 이 것이 근육 이완입니다. 아무 이상은 없지만 근육이 풀려 걷지를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소에서는 정기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어 근육도 긴장시켜 보고,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또한 절대 누워있으면 안됩니다. 웃기는 조크이지만, 심부름 잘하고 굳은 일 잘하는 대원이 정상을 간다고 합니다. 부려먹으려던 선배들이 만든 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튼 무력감을 이기기 위해 파이팅을 했습니다. 그리고 걸을 때마다 힘을 주어 앞으로 차고 나갔습니다. 운전사에 대한 원망은 어느새 사라졌습니다. 모든 것이 풀리려고 하면 일시에 풀린다더니… 모퉁이를 돌자마자 거짓말 같이 카르둥라가 나왔습니다. 무아지경에서 열심히 걸은 줄도 모르고 도착했습니다. 신성의 땅을 알리는 룽따르가 하늘을 덮고 쵸르텐이 가장 높은 바위 위에 앉아있었습니다. 운전자가 따끈한 차를 들고 저를 기다립니다. 웃으며 그를 지나 쵸르텐을 향해 올랐습니다. 하지만 더 걸어도 좋았을 것을 뭔가 부족하여 가파른 산을 10여분 정도 더 올랐습니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쵸르텐은 왜 흰색일까?' '우리나라 불탑은 무슨 색이지?' '서양 교회의 첨탑은 지정색이 있었나?' '힌두의 탑은, 모스크 돔은?' 푸른 청색의 타일을 박은 모스크의 돔은 화려하기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흙회색의 돔도 많이 있습니다. 라호르의 모스크는 붉은 사암 돔입니다. 타지마할은 흰색의 대리석 돔입니다. 어느 종교도 색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라마는 라마 백탑이라고 탑의 색을 지정해 버렸습니다. 무슨 이유가 있을까요?
누브라 계곡은 파키스탄의 훈자를 중심으로 한 바투라나 시샴 계곡을 짤라 옮겨다 놓은 듯합니다. 이 곳의 한적함은 더 매력적입니다. 여행사가 자랑하듯 권하는 곳이 모래사막 카멜사파리 입니다. 부푼 기대를 안고 카멜사파리를 찾아 갔습니다. 평범한 사막이었으면 실망했을 법도 하지만 계곡에 펼쳐진 거친 암봉을 배경으로 맑은 물, 그리고 초지까지 갖추어진 사구 지대는 아름다웠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구를 그냥 두면 더 좋지 않았을까? 맨발로 걷고 사구에 앉아 사색할 여유를 주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을 행복하고 재미있게 하지 않았을까? 보통 나이가 많은 여행자는 인생에서 얻은 경험이 많고, 세계 도처 하이라이트 위주의 여행을 경험 했으므로 유사한 복제품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연 그대로 놓여진 곳을 더욱 값지게 생각합니다. 그냥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불필요한 포장이 도리어 감동을 반감 시켰지만, 그래도 누브라 계곡은 메마른 대지에 젖과 꿀이 흐르는 라닥의 가나안이었습니다.
히말라야를 넘어 남북을 이어놓은 소통로는 여럿 있습니다. 라닥도 그 중 하나입니다. 중국 신강과 티벳 서부를 인도와 이어놓은 길이 바로 제가 하루 밤 묵은 누브라 계곡의 게스트 하우스입니다. 인도 대륙이 티벳과 연결되어 있는 길로에는 무스탕 계곡, 랑탕 계곡, 둘포, 쿰부 쪽에는 낭파라 계곡, 티벳탄 하이웨이로 유명한 장무 ~ 코다리, 그 외에도 아삼 히말라야, 시킴 히말라야에 다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 길을 내는 건 당연한 일이고, 자연의 장벽인 히말라야도 인간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특히 둘포는 아직까지도 미지의 세계로 남은 구간입니다. 티벳 서부에는 소금 호수가 많이 있는데, 40여개가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 지대가 광범위해 작은 것들은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약 4,500만년 전 일어났던 어떤 사건의 후유증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후손들은 수백년간 그로 인해 생계형 비즈니스를 만들어 냈습니다. 소금 판을 호수에서 캐내어 야크에 싣고 히말라야를 넘어 둘포 지방에 가져다 주고 옥수수를 가득 받아 야크에 싣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곡식 농사가 불가능한 티벳 서부에 소금이 준 선물이기도 합니다.
낭파라 계곡은 셀파의 탈출로로 유명합니다. 에베레스트 초등자인 텐징 노르게이의 조상도 낭파라 계곡으로 탈출해 타메에서 거주했다가 다질링으로 이주했습니다. 초기 셀파의 고향은 지금과 달리 다질링입니다. 그는 여기서 쿠리(짐꾼)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일약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지금은 셀파 알파인 스쿨이 남체에 있지만, 영국인들이 세웠던 초기의 알파인 스쿨도 다질링에 있었습니다.
혜초는 누브라 계곡을 지나지 않았을까… 혜초는 카라코람을 넘어 간다라 왕국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천축국(인도) 곳곳을 여행하며, 불법을 구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자세한 기록을 남겨 당시 시대 상황을 이해하고 사라진 유적을 찾아내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가 라닥을 방문했는지는 기록에 없습니다. 그가 온 길과 간 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행로를 두고 당 왕조의 지시를 받은 스파이라는 우스갯 소리도 있습니다. 어쩜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 왕조는 몇 백년이지만 그가 남긴 '대당서역기'는 지금도 가치있게 살아 있지 않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