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와빠루] 제 2부 : 새로운 인연(因緣)의 시작
[노트펫] 1974년 4월 어느 날, 백설기 같이 새하얀 스피츠 빠루는 마당에서 어린 주인이 던져주는 테니스공을 연신 물고 왔다. 빠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런 공 대신 쥐나 잡아오지.”라고 속삭였다. 비단 우리 집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쥐는 대부분 가정의 골칫거리였다.
쥐는 사람이 먹을 것에 더러운 입을 함부로 대고, 이곳저곳에 분변을 남겨 놓았다. 쥐의 배설물은 여러 질병을 옮기는 원인이어서 그 흔적만 보여도 죄다 쓰레기통에 쏟아 부었다. 먹을 것만 못쓰게 만드는 게 아니었다. 갉는 것을 즐기는 쥐는 목조로 된 주택 외장재나 화장실의 비누 같은 것에도 이빨 자국을 남겼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 쥐는 어떤 존재보다도 성가신 존재였다.
쥐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설령 보여도 잡기 힘들 정도로 재빨랐다. 영리한 쥐는 인간과 개의 움직임이 자신보다 느린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 결과 마당은 사람과 쥐가 공유하는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사람이 원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마당은 속수무책(束手無策)의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마당에 쥐가 보이면 아빠는 고함을 지르며 빗자루를 들고 달려갔다. 그런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쥐는 없다. 이미 쥐는 도망친 지 오래였다. 인간이 내는 고함소리는 쥐의 입장에서는 적이 스스로 내는 공습경보였다. 아빠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어린이의 눈에는 쥐에게 도망가라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빠루의 반응도 아빠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아무 필요 없는 대응이었다. 무용지물(無用之物), 그 자체였다. 빠루는 일단 쥐를 보면 잡을 생각을 하는 대신 짖어댔다. 그 행동을 나름 분석하면 ‘쥐가 출몰했으니 사람들이 빨리 와서 나 대신 쥐를 잡으라.’는 의미였다. 빠루는 분명 징그럽게 생긴 쥐를 잡는 일은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집을 지키는 번견(番犬)의 전형적인 특징은 외부 침입자가 나타나면 맹렬하게 짖는 것이다. 그러면 그 소리를 듣고 주인이 등장해서 조치를 취하게 된다. 빠루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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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에 대해 경계심이 강한 셰틀랜드쉽독(Shetland Sheepdog)도 좋은 번견이다. 물론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에서는 헛짖음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 빠루도 사진 속의 개들과 크기가 비슷했다. 2011년 삼청동 애견카페 까로맘에서 촬영 |
재밌는 것은 쥐의 반응이었다. 빠루가 열심히 짖으면 마지못해 움직이는 시늉을 했다. 빠루를 한 번 쳐다보면서 느릿하게 움직였다. 자신의 눈에서 쥐가 사라질 때까지 빠루는 짖었다. 쥐를 잡는 게 목적인 아닌 쥐를 마당에서 내쫓아 버리는 게 빠루의 대응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겁이 많지만 나는 심한 편이었다. 쥐가 무서워서 감히 마당에도 함부로 나가지 못했다. 나갈 일이 있으면 그래도 충실한 호위무사 역할을 하는 빠루부터 찾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이상 이렇게 살기는 싫었다. 당시 내가 생각한 상황은 해결책은 하나뿐이었다. 잃어버린 마당에서의 자유를 찾는 유일한 방법은 고양이를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고양이만이 마당의 무법자 쥐들을 소탕할 수 있어 보였다.
생태계의 천적을 통해 마당의 질서를 회복하는 쪽으로 생각이 이르게 되자, 그날부터 고양이를 사달라고 부모님께 노래를 불렀다. 능력자 ‘미키 마우스’도 능히 잡을 수 있는 그런 고양이를 구해달라고 했다.
여덟 살 소년에게 고양이는 일상의 평화를 찾아주는 슈퍼맨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졌다. 그런데 슈퍼 히어로의 등장 시기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그것도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인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정사(正史)인 한서<漢書>는 교만한 군대는 반드시 패한다는 교병필패(驕兵必敗)라는 사자성어를 전하고 있다. 자신들에 비해 운동신경이 둔한 사람과 스피츠를 업신여기고 마당에서 놀이를 즐기던 쥐들은 얼마 후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동물인문학 저자 이강원(powerranger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