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와빠루] 제 17부
[노트펫] 자유(自由)의 사전적인 뜻은 ‘다른 존재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시절 필자의 유년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던 고양이와 개는 각자 크기가 다른 자유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고양이 나비는 무제한의 자유를, 스피츠견 빠루는 제한적 자유만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나비는 아침 식사 후 동네 나들이를 나갔다가 해가 질 무렵이 되면 귀가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나비의 뱃속에는 배꼽시계가 달려있어서 정확하게 귀가한다.”고 하셨다.
반면 빠루는 나비처럼 큰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비록 당시 다른 집의 개들처럼 짧은 목줄을 하고 답답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마당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만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빠루가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며 매일 점심 식사를 마치면 삼십 여분 정도 동네 산책을 다녀오곤 했다. 외부 세상으로의 외출은 주인과 함께 하는 것이 빠루의 일상이었다.
필자의 눈에는 개나 고양이나 모두 귀엽고 소중한 존재인데, 왜 이렇게 차별 대우를 하는 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빠루가 자신의 위치에 비해 너무 작은 자유를 누리지 않느냐?”고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니, 할아버지는 아래와 같이 명쾌하게 정리해주셨다.
첫째, 안전사고 예방 때문이었다. 흔히 “우리 집 개는 절대 물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는 자신의 개를 잘 모르고 하는 얘기일 뿐이다. 어린 아이를 물 수도 있고, 자기보다 다른 작은 개를 물 수도 있다.
또한 덩치 큰 개에게 빠루가 물려서 다칠 수도 있는 법이다. 주인 없이 대문 밖으로 나간 개는 철저히 자신의 생존본능에 따른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평소 믿음이었다.
둘째, 공공위생 때문이다. 1970년대 당시 골목 곳곳에 개의 분변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현상을 극히 혐오했다. 평소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지론이었다. 개를 키우면서 남의 집 앞에 분변을 보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말씀을 수시로 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백번 지당한 이야기다.
셋째, 개장수 때문이다. 당시 개장수들은 수시로 동네 골목을 돌며 배회하던 개들을 잡아가곤 했다. 만약 빠루에게 나비 같은 무제한의 자유를 주었다가는 개장수에게 당장 끌려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넷째, 독극물 피해 방지 때문이다. 당시에는 창궐하는 쥐를 잡기 위해 대문 근처나 전봇대 밑 곳곳을 쥐약을 놓았다. 개나 고양이 중에는 그런 미끼에 잘못 걸려서 죽는 일이 종종 있었다.(편집자주* 지금 시대에도 바깥에 뿌려진 독극물 사고가 드물지만 발생한다. 쥐약과 유박비료가 대표적이다. 과거와 달라졌다면 쥐약이나 유박비료가 발견됐을 경우 반려가족의 항의가 빗발치고 수거에 들어간다는 점이다.)
이미 40년이 지난 일이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할아버지는 손자가 아무리 이상하게 질문해도, 정확하게 정리하는 힘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사자성어인 우문현답(愚問賢答), 그 자체였다.
*동물인문학 저자 이강원(powerranger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