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와빠루] 제 32부
[노트펫] 인류는 말을 할 수 있고, 글을 남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에는 주제가 있는 법이다.
인류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가장 대중적인 이슈는 단연 권선징악(勸善懲惡)이었다. ‘착한 일을 권하고, 나쁜 일을 징계한다.’는 권선징악이라는 심플한 주제로 인류는 수많은 이야기를 꾸며냈다.
지옥의 군주인 루시퍼(Lucifer)가 주인공 역할을 맡은 미드 ‘루시퍼’의 주제도 역시 권선징악이다. 드라마의 루시퍼(톰 엘리스 扮)는 불의를 참지 못하고 악인들을 몇 년 동안 계속 체포한다. 마치 지구에 정의를 실현키 위해 지옥에서 루시퍼가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1950~60년대만 해도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던 영화 장르는 서부극(western movie)이었다. 19세기 황량한 개척기 서부에서 정의 실현을 위해서는 법보다는 총구가 빨랐다. 서부극은 권선징악이라는 단순 명료한 플롯으로 영화 팬들을 열광시켰다.
대부분의 서부 영화는 수십 명의 부하를 거느린 강력한 악당이 존재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가난한 농부들을 괴롭힌다. 하지만 마치 신이 보낸 천사처럼 등장하는 외로운 총잡이 앞에 서부의 거친 악당들은 속절없이 무너진다. 1952년 작품 셰인(Shane)이 대표적이다.
대부분의 서부극에서는 먼지를 뒤집어 쓴 주인공이 주점(bar)에 자신의 말을 입구에 묶고 들어와서 악당 졸개들을 자비 없이 해치우는 장면이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 컷을 보며 필자는 총잡이 대신 영화 팬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말에 주목해본다. 한다.
말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생존에 민감하다. 그래서 생존 본능이 다른 그 어떠한 것을 압도한다. 동물이 낯선 환경보다 익숙한 환경을 좋아하는 것은 익숙한 것이 그만큼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서부의 주점 앞에 묶인 말도 아마 유쾌하지는 않은 기분일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집 강아지 스피츠 빠루를 데리고 산책하다가 친구들을 만난 적이 있다. 아이들은 새로 산 축구공을 바닥에 튕기면서 같이 축구하자고 제안했다. 같이 산책을 나온 빠루가 마음에 걸렸지만 아이들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전봇대에 빠루를 묶어놓고 놀기 시작했다.
얼마 후 축구를 하던 곳에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할아버지는 전봇대에 묶어둔 빠루의 목줄을 풀어주며 “빠루가 낑낑거리는 것을 보지 못했니? 말 못하는 동물한테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며 손자를 혼냈다.
빠루는 할아버지를 보고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빠루에게 미안했다. 그 순간 얼마 전 아버지와 같이 본 서부극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아마 영화 속의 말도 빠루와 비슷한 심정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식재료 구입을 위해 동네 마트를 들렀다. 그런데 쇼핑 카트를 두는 곳에 난데없이 푸들이 묶여 있었다. 사연을 직원에게 물어보니 “어떤 손님이 마트에 올 때마다 이런다.”면서 “다음에는 이러지 말고 집에 개를 두고 오라고 신신 당부했다.”고 전했다.
푸들은 추운 날씨에 덜덜 떨며 낑낑거렸다.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는 것 같았다. 푸들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는 것 같았다. 주인의 짧은 부재에 푸들이 느끼는 슬픔과 불안이 진심으로 전해졌다.
바로 그 때 주인이 나왔다. 푸들은 고립된 성에서 천군만마를 만난 병사처럼 사기가 올랐다. 푸들에게 이런 불행이 재발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인문학 저자 이강원(powerranger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