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의 족장 아뚜에이는 화형을 당했습니다. 사형장에서 그의 사제는 하나님의 말을 믿으면 영광과 영원한 휴식이 있는 하늘나라로 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말하자 아뚜에이는 조금의 생각을 마친 뒤 카톨릭 교인들도 하늘나라에 가느냐고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사제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선한 사람들만 간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자 족장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그곳에 가길 원치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있는 곳에 가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잔인한 사람들을 보고 싶지 않으므로 대신 지옥에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바로돌로메 데 라스 까사스 수도사가 1542년에 발간한 [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간략 보고서]에서 카톨릭의 이름으로 행해진 잔악함을 설명하는 내용 중 일부입니다. 아뚜에이는 지옥에 가기 위해, 그보다 카톨릭 교인을 만나지 않기 위해 끝까지 개종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카톨릭이 아메리카에서 뿌리를 잘 못 내렸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까사스 수도사는 인디오의 편에서 정복자들의 잔인함과 난폭함을 고발한 목회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가 발간한 [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간략 보고서]가 유럽에 발간되고 이를 읽은 사람들의 비난이 일면서 원주민 인디오에 대한 논쟁이 교회와 스페인 왕실에서 일어납니다.
그 결과 엔꼬미엔다의 지배가 아닌 스페인 국왕의 신민으로 인정하고 보호 받게 한다는 신법(Leyes Nuevas)이 만들어 집니다. 그날이 1542년 11월 20일인데 기념할만한 날입니다. 왜냐하면 인디오를 대신해 아프리카 흑인 노예가 남미로 향하는 흑인 노예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의 이름으로 행해진 잔악한 파괴 행위 중 남미에서 벌어진 일은 으뜸입니다. 그것은 문명 단계가 낮아 지워버릴 수 있다는 오만과 깨끗이 지워야 순결한 카톨릭의 땅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는 종교적 신념,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탐욕의 산물입니다. 이런 이유로 아메리카에서는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파괴가 다양하게 이루어집니다.
파괴는 공포를 무기 삼아 상대를 제압하기 때문에 압제하는 공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하지만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아메리카의 마야나 아프리카의 피그미족은 자살을 숭고한 의식으로 받아들이는 풍속이 있습니다. 이들은 현실의 고통이 다가왔을 때 온 가족 또는 공동체가 자살 의식을 선택하곤 합니다.
유대가 마사다에서 자결을 선택했듯이 공동체의 자결 의식은 숭고한 내적 이유가 있겠지만 그보다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선택이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습니다. 각종 모욕과 고통을 주고 죽이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니 스스로 존엄하게 삶을 마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쿠바의 예를 보면 콜롬버스가 쿠바에 도착했을 때 쿠바에는 세 부족이 존재했습니다. 동굴에서 살며 사냥과 수렵을 일삼은 용맹스러운 부족인 시보네예족, 알려진 것이 없는 과나후아타베예족, 가장 발달한 문명을 가진 부족으로 카리브 해안에 거주했던 타이노족입니다. 이들의 인구는 11만 명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콜롬버스가 도착하고 31년이 지난 1560년, 쿠바의 원주민은 전멸한 것으로 기록됩니다. 스페인이 남긴 기록인데 더 이상 원주민 인디오를 찾을 수 없었다는 기록입니다. 얼마나 잔인하고 무자비 했으면 저승에서 마저도 카톨릭 신자와 대면하길 거부했을까요, 에뚜에이 추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한 사람의 감상적 주장이 아닙니다. 그건 수치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깨끗이 청소하고 나서 새로운 쿠바, 새로운 대륙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에뚜에이 추장이 살았을 비날레스 계곡으로 하루 여행을 떠납니다. 비날레스 계곡은 아바나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외곽의 카르스트 석회 동굴지대입니다. 이 지역은 중생대 쥐라기 때 생겨난 '모고테'라는 원뿔형의 석회암 언덕이 계곡안에 모여있고 석회암 산 아래로 석회 동굴이 있어 숨어 살기 좋은 지형입니다. 처음 차에서 내린 곳은 산을 깎아 만든 거대한 벽화 앞입니다.
혁명의 나라가 그렇듯 벽화는 인위적이고 선동적인 냄새가 강합니다. 아르헨티나의 미술 학도가 혁명을 찬미하여 이 곳에 와서 얇은 붓으로 점을 찍으며 벽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유치하지만 그 정성이 갸륵한 벽화입니다. 두 번째로 작은 석회 동굴에 들어갑니다. 이 곳은 아프리카에서 멀리 끌려온 노예들이 농장을 탈출해 숨어 살던 동굴이라고 합니다. 동굴을 빠져나오는데 흑인 노예 복장을 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향을 그리며 아프리카 춤을 춥니다. 그리고는 돈을 구걸합니다.
옛날에는 사냥을 하거나 마토케(Matoke)를 먹고 살았을텐데, 지금은 돈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원주민을 멸절시키고 아프리카에서 들여온 노예로 쿠바는 인구의 흑인이 12%, 물라토가 22%나 차지합니다. 그런데 인디오가 모두 사라졌으니 인디오와 흑인의 혼혈인 삼보는 거의 없고 60%가 백인이니 쿠바는 백인의 나라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성은 없고 노예와 주인만 있는 그런 나라가 쿠바의 시작입니다.
비날레스 계곡의 마지막 여정인 쿠바다 인디오 동굴에 들어갑니다. 배를 타고 지하 세계를 탐험하는 재미가 쏠쏠한데 계림의 노적암, 관암, 장가계의 황룡 동굴, 운남의 구향 동굴을 다 본지라 그에 못 미치는 작고 부실한 규모에 감동은 별로 없었습니다. 볼만한 곳으로는 산토 토마스 동굴이 있다는데 가이드는 개방되어 있지 않은 곳이라서 찾아가기는 어렵다고 말합니다.
산토 토마스 동굴은 일곱층으로 동굴이 이어져 있어 마치 거대한 도시 지하철 역사를 연상시킨다고 하지만 동굴 탐사가 아닌 동굴 주유인데, 탐방 지역은 극히 제한될 테고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 없이 돌아섭니다. 그렇게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젊고 발랄한 백인 여성이 인디오 복장과 얼굴에는 물감으로 고양이 수염도 그리고 모닥불 주위를 돌며 춤을 추고 있습니다. 언젠가 살았을 비날레스 계곡의 인디오를 그렇게 흉내 내는 것입니다. 다 죽여놓고 이제와 무엇을 얻어 먹겠다고 인디오 흉내를…
비날레스 계곡은 풍요로운 대지의 선물로 가득합니다. 쿠바는 혁명을 일으키고 어떻게든 미국과 등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 조치 중의 하나가 마이애미의 망명 정부에 친척들을 데려가도 좋다는 선언을 합니다. 이는 혁명 정부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떠나도 좋다는 뜻이기도 해서 같은 해 9월까지 무려 12만 5천여 명이 쿠바를 떠나게 됩니다.
결국 쿠바 혁명 정부를 깡패 정권으로 몰아 부치던 미국은 도리어 망명을 막아달라며 쿠바에 부탁하기에 이르고 쿠바가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해안을 봉쇄함으로써 쿠바 탈출은 일단락 됩니다. 쿠바에서 혁명이 일어난 3년 뒤에 미국은 쿠바 난민 1,500명을 훈련시켜 피그미만에 상륙 시킵니다. 반 정부군이 쿠바에 상륙하면 혁명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부에서 들고 일어나 미국은 쉽게 혁명 정부를 전복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500여 명의 반군은 쿠바에 상륙한지 이틀만에 전원 진압되었습니다. 무기가 앞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건 쿠바에 아직 혁명 열기가 살아있었고, 3년 전 12만여 명이나 혁명 정부에 반대한 사람들이 쿠바를 떠나 쿠바 내에는 혁명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쿠바에 상륙한 82명 중 12명 만이 살아남아 3년 뒤 쿠바를 접수한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에 비해 미국의 성과는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것은 역사의 편에 서느냐 반대편에 서느냐의 차이가 아닐까요, 우리나라는 6.25 민족 전쟁이 반대 세력을 청소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남한테 숨어있던 남노당은 대부분 소멸되었거나 북으로 넘어갔고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대부분 제거되거나 죽음을 당했습니다. 북한 내 공산당에 부정적이었던 사람들은 1.4 후퇴 때 대거 남으로 넘어와 북한에도 반대 세력이 거의 사라집니다.
아마 그런 세력 정리가 남북의 대치를 더욱 공공연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남북은 좀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을 테고, 대립이 아닌 공존의 길을 찾기 위해 애썼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한참 성장해야 할 70, 80년대에 정치 논쟁 없이 경제에 치중할 수 있었던 요인이 된 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확실한 건 우리는 250만여 명이나 희생되며 반대 세력을 정리했건만 쿠바는 평화적이었다는 점을 새겨 두어야겠습니다.
미국과 쿠바는 피그미만 사건 이 후 급격히 상호불신하고 멀어집니다. 쿠바는 소련으로 한 발 더 다가가고 미국은 쿠바를 경계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이 때 미사일 사태가 터지게 됩니다. 캐네디 대통령을 얼굴만큼이나 멋진 남자로 만든 사건입니다. 미국이 소련의 텃밭인 터키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자 소련의 후루시초프는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려 했고 이를 미국이 봉쇄하며 세계 3차 대전으로 치닫던 사건입니다.
미사일 사태 결과 쿠바는 미국으로부터 불가침 조약을 받아 냅니다. 하지만 이 때부터 미국의 쿠바 경제 봉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더불어 남미의 횡재도 시작됩니다. 미국은 자국 앞마당인 남미에 좌파의 물결을 잠재우려 발전 동맹을 추진합니다. 발전 동맹은 2차 대전 후 마샬프랜을 가동해 유럽 재건을 도왔듯이 발전 동맹으로 남미의 발전과 근대화를 도와 사회주의의 확산을 막겠다는 아주 긍정적인 정책 전환입니다. 스페인이 무조건 똑같이 하겠다며 덤볐지만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는 걸 쿠바로부터 미국이 배운 것입니다.
발전 동맹에 쿠바가 제외되면서, 아니 쿠바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쿠바는 사회주의 몇 나라와만 교역을 하며 자체 발전을 꾀합니다. 그런 와중에 소련 연방의 붕괴는 쿠바에 큰 타격이 됩니다. 쿠바는 모든 것을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국산업체제 전환을 하게 됩니다. 내 방식대로 간다는 북한과 쿠바는 동격이지만 실상은 천양지차입니다.
비날레스 계곡을 나오면 이러한 환경에서 빛을 보기 시작한 유기농 농업 체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기농 농업은 최근 수 년 사이에 큰 관심을 일으키지만 화학 비료 시장을 장악한 미국이 비료 수출을 금지해 쿠바는 70년대부터 화학 비료가 아닌 유기농 비료를 이용한 농업에 관심을 기울였고 지금의 쿠바 유기농 농업이 미국의 대량 생산, 소비의 화학 농업의 대안으로 세계적 추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봉쇄가 가져다 준 쿠바의 첫 번째 선물입니다.
의료 분야에서도 쿠바는 독특합니다. 제약 회사 역시 미국과 유럽이 장악하고 있어 쿠바는 의료품을 얻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다양한 의료 분야 중 국민 생활에 꼭 필요한 기초 예방 접종에 의학 역량을 집중시킵니다. 그 결과 현재 의외의 평가를 받게 됩니다. 쿠바는 다국적 제약 회사들이 화학적으로 백신을 대량 생산할 때 친환경적이고 친생체적인 자연 백신을 만들기 위해 치중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백신은 장기 사용으로 인한 후유증이나 내성이 없으며 안전하고 몸을 해치지 않는 백신으로 평가받아 유럽에서는 가장 몸에 좋은 안전한 백신으로 고가에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 역시 미국이 쿠바에게 준 두 번째 선물입니다. 성형 수술 등 생명과 직결되지 않는 분야의 발전은 미흡하지만 모든 국민 건강에 직결되는 기초 의료의 발전과 무상 의료 혜택은 쿠바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그런 저런 쿠바의 자랑을 들으며 방문한 농가에서는 텃밭에서 자란 38여 가지의 유기농 야채로 준비한 점심을 차려줍니다. 식탁에 앉으면 먼저 음료를 한 잔 주는데, 이름이 Anti 스테레스랍니다. 왜 이름을 그리 지었냐고 물으니 자기 집에서 나는 5가지의 좋은 풀과 약재에 오늘 짠 우유를 넣고 갈은다음 그 위에 코코아 가루를 뿌린 음료라서 마시면 스트레스가 싹 가신다고 설명합니다.
어떻게 만드는지 집에 돌아가서 만들어 먹고 싶다고 해도 본인 집의 비법이라며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가서도 스트레스가 오지 말라고 두 잔, 세 잔 미리 마셔두었습니다. 음료와 다과가 끝나고 나면 5시간 동안 훈제했다는 통 돼지와 야채 한가득 점심상이 푸짐하게 차려집니다. 쿠바에서 나흘 째, 제가 받은 느낌은 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행사는 정해진 내용과 품질을 정하고 그에 알맞은 금액을 정합니다. 그리고 가격은 흥정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나라로 부탄이 있습니다. 부탄은 여행 일정을 여행사와 이야기하지만 여행 경비는 관광국에 입금시키고 여행사는 여행 진행에 필요한 돈을 관광국에서 받습니다. 그래서 여행 내용이 무엇이든 하루 $250로 정해져 있습니다. 쿠바도 이런 시스템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식사 하나 하나 특별한 요구 사항이 없어도 일정한 수준을 유지해주며 풍요롭습니다. 암보스 문도스 호텔에 뜨거운 물이 안 나오고 저녁부터 아침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상황에 비추어 봐도 식사나 차량 수준은 무척이나 좋습니다.
사회주의는 거짓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것이 거짓투성이기도 합니다. 말은 장황한데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으니 다 거짓입니다. 그럴 때면 사회 탓을 합니다. 자기 탓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왔는데 제가 받은 쿠바의 인상은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나라입니다.
부족하다고 모르는 체 하는 나라가 아닌 손님을 초대했으니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꺼내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피델 카스트로는 차베스와 함께 반미 동맹을 유지하다 백성들만 굶주리고 이제는 권좌에서 내려와 조용히 변화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시점에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는 프란시스코 교황의 친서를 받습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교황의 친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43년 만에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현명하게도 톨스토이의 명언을 알고 있었나 봅니다.
"제일 맛있는 음식은 목구멍의 말을 삼키는 것이다." 두 사람은 하고 싶은 말과 비난하고 싶은 말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맛있는 음식을 삼키 듯 사연들을 묻어두니 사랑이 싹트고 화해의 악수가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에 마주서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화해의 악수가 필요하니 톨스토이의 말을 새겨야겠습니다. "제일 맛있는 음식은 목구멍의 말을 삼키는 것이다."
쿠바의 가이드는 지금이 가장 어려운 것 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10년 전 쿠바는 그래도 활기차고 여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때보다 많이 우울해 보인다고 말하는 한국인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체게바라의 걸개 그림과 혁명의 상징들이 도시 곳곳에서 사라진 모습도 아쉽다고 말합니다.
쿠바는 변화의 문턱에 섰고 변화를 시작하려 합니다. 혁명의 열기는 분명 식었습니다. 혁명은 방문객의 회한 거리로만 남아있습니다. 혁명의 시대를 보내고 생존의 시대에 들어선 쿠바, 라울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의 미래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