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에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가서 칠레의 아타카마로 달리고 다시 안데스를 끼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가 아르헨티나의 멘도사(Mendoza)로 향합니다.
멘도사는 안데스의 최고봉인 아콩카구아(Aconcagua)로 인해 유명한 도시가 아닌, 많은 사연을 가진 도시입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의 페론과 여배우 에바가 처음 만난 도시이기도 하고 포도주 생산이 가장 많은 도시로도 유명합니다.
무엇보다 작고 아담한 도시는 여행자가 쉬어가기 좋게 한가롭고 여유롭습니다. 호텔비도 저렴해서 좀도둑이 있다는 것만 빼면 여행자에게 흠잡을 데 없는 도시입니다. 안데스를 넘어 멘도사로 달려가는 이층 버스는 남미여행에서 꼭 타봐야 할 버스 구간 중 하나입니다.
저는 여행 중 이 구간 이외에 멘도사에서 바릴로체(Bariloche)를 잇는 버스를 한 번 더 탔는데, 18시간이 넘는 장거리임에도 편안한 버스여행이었습니다. 버스여행은 2층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면 매력이 한층 더 합니다. 산티아고에서 멘도사를 잇는 버스는 낮에 안데스를 넘기 때문에 보는 재미를 더 합니다.
한 가지 번거로운 일이라면 국경을 통과하며 세관검사를 받아야 하는 일인데, 운 좋게도 차량 스캔만으로 끝내버리니 짐을 차에서 꺼내고 싣는 일이 줄어들었습니다. 안데스 산줄기를 넘는 고갯마루에 가까워질수록 안개가 몰려와 방풍복을 꺼내 입습니다.
왜 산에 오르면 물기를 머금어 촉촉한 안개가 피어오를까요, 안개는 공기주머니 함수용량의 변화로 발생하는데 온도가 내려가면 함수용량이 감소하여 수분을 밖으로 분출하기 때문에 대기가 안개로 얼굴을 바꾸고, 온도가 올라가면 함수용량이 증가하면서 주변의 수분을 흡수하기 때문에 대기가 맑아진다고 합니다. 그러니 산에 안개가 끼는 건 너무도 당연한 자연 현상입니다.
버스가 산릉을 넘어 아래로 내달리니 온도가 올라가고 하늘이 맑게 개이며 멀리 산자락이 보이고 끝도 없이 넓은 포도밭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아르헨티나의 와인생산량은 세계 5위지만 멘도사로만 따져 보면 세계 최고입니다.
아르헨티나의 포도농장의 90%가 멘도사에 있고 생산되는 와인 중 70% 이상이 멘도사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와인생산은 또 다른 의미도 지녔습니다. 땅이 비옥하고 일조량이 많으면서도 물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풍요롭고 멋진 땅, 안데스의 가슴에 자리 잡은 멘도사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이 땅을 배경으로 세력을 넓히고 좀 전에 넘었던 안데스를 넘어 칠레에 독립을 선사한 독립영웅인 호세 데 산 마르틴(Jose de San Martin) 장군의 근거지입니다.
역사적으로 산맥을 넘어 상대의 허를 찌른 전략가로는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대륙을 넘본 알렉산더,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궁지에 빠뜨린 한니발, 파밀을 넘어 탕구트의 세력을 무력화한 당나라의 고선지,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격한 나폴레옹 등이 있습니다만 남미에선 이들의 뒤를 이어 안데스를 넘어 스페인군을 무력화시키고 칠레를 독립시킨 산 마르틴 장군이 있습니다.
산맥을 넘는 작전은 무거운 전쟁도구와 식량을 포함 군대가 일사불란하게 행동해야 하므로 보통의 결단력으로는 실행하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적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으면 저항 한 번 못하고 괴멸되기 때문에 산을 넘는 전략은 위험하지만 상대의 허를 찌르는 성과도 동반합니다. 칠레로 들어가는 방법은 안데스를 넘는 방법밖에 없으므로 산 마르틴은 스페인의 방어선에 걸리지 않고 안데스를 넘는 작전을 계획합니다.
그는 우선 원주민에게 아콩카구아 남쪽을 돌아 안데스를 넘는다고 거짓 소문을 흘리고 스페인군이 산 반대편에 주둔하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1817년 1월, 약 5,000명의 군대와 1,600마리의 말을 이끌고 멘도사에서 출발해 안데스산맥을 넘는 강행군을 시작합니다.
스페인의 공격을 피해 아콩카구아 북쪽 산자락을 지나면서 추위와 바람, 얼음 대지와 고산병까지 곤란한 자연환경에 처하지만 산 마르틴은 무사히 안데스를 넘습니다. 그리고 허겁지겁 따라오는 스페인군을 차카부코(Chacabuco) 에서 패퇴시킴으로써 칠레독립에 불을 지핍니다.
이후 산 마르틴은 마이푸(Maipu) 전투에서 승리하여 칠레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했고, 산티아고의 시민들은 해방자로서 그를 칠레 정부의 수반으로 추대합니다. 그러나 산 마르틴은 칠레 독립지도자인 ‘베르나르도 오이긴스(Bernardo O’Higgins Riquelm)’에게 대통령을 양보하고 칠레를 떠납니다. 그의 그런 모습은 페루에서도 반복됩니다.
남미의 마지막 식민도시인 페루를 해방함으로써 남미대륙이 전부 독립되었을 때, 그는 모든 권한을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에게 넘긴 채 프랑스로 떠납니다. 그리고 다시는 남미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명예와 영광에 집착하지 않는 위인이었기에 현실의 권세와 영광을 추구하지 않고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평생을 보냅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이 어디까지인지 알고 있는 진정한 현인인 것 같습니다.
아류 인간들이 서로 물고 뜯는 남미의 정치판에 뛰어들었다면 그에게도 상처만 남았을 테니까요… 버스는 여전히 산 마르틴의 군대가 고생스럽게 지나간 길을 따라 달립니다. 산 마르틴의 사령부가 있었던 멘도사와 산 마르틴이 독립시킨 산티아고를 잇는 길은 숭고한 이상으로 구현된 도로입니다.
산티아고에서 출발한 차는 8시간이 지나 멘도사 터미널에 닿습니다. 터미널에서 아콩카구아 트레킹을 안내할 ‘꼴로(Colo)’라는 아가씨가 맞이합니다. 아콩카구아 정상을 두 번이나 올랐다는 꼴로는 경험 많은 등산가이드 같이 체구도 단단하고 행동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호텔로 이동하는 차량에서 그녀는 아콩카구아 트레킹에 필요한 절차를 설명합니다. 내일 아침엔 국립공원 사무실로 가서 허가를 받아야 하고 등산 장비 점에 가서 다운 침낭을 빌리고 슈퍼에 가서 생수를 사야 한다며 하나하나 확인하고 그 모든 일을 10시까지 해결한 후, 2시간 30분을 달려 푸엔테 델 잉카에 도착해 짐을 말에 태우고 트레킹을 시작하는 데 꼴라는 베이스캠프인 콘플루엔시아(Confluencia, 3,400m)에 늦지 않게 도착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늦으면 기온이 크게 내려가고 안개가 끼거나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이라며 추가로 설명을 해줍니다.
이미 예약할 때 확인한 사항이라 고개를 끄덕이고 마니 그녀는 질문이 없느냐며 묻습니다. 아무 질문 없이 끄덕이기만 하는 제가 걱정스러운 모양입니다.
저도 30년 전에는 자네가 오른 최고점보다 1,000m나 높이 올랐으니 걱정 말라고 하려다가 그녀에 대한 일상의 질문을 시작합니다. 그녀는 10대부터 산악활동을 했고 지금은 등산 가이드가 직업이라고 소개합니다. 12월부터 일을 시작하는 데, 아콩카구아는 등반시즌이 짧아 아콩카구아 시즌이 끝나면 파타고니아로 내려가 등산 가이드 일을 하고 파타고니아 마저 끝나면 4월 말쯤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고향에 돌아가면 12월이 오기까지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니 그 동안 번 돈으로 남자친구와 여행을 가거나, 남는 시간엔 팝에서 일한다며 한번 찾아와 한잔 하라고 농담까지 건넵니다. 단단한 몸이 재산인 젊은이의 호기가 느껴져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젊음은 그런 거죠… 행복할 의무가 있고 좋아하는 일에 집중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괜히 부질없는 걱정이 앞서 하고 싶은 일을 못한다면 그 사회는 권리와 의무는 없이 걱정만 쌓이니 많이 우울할 거 같습니다.
안데스의 최고봉인 아콩카구아에 오르려는 젊은이는 어떤 의무와 권리를 가져야 할까요… 일본의 등반가이자 탐험가인 우에무라 나오미(植村 直己)는 5대륙 최고봉 중 하나인 아콩카구아를 오르기 위해 아콩카구아를 찾았고 단독으로 정상에 오릅니다. 우에무라 나오미뿐이 아닙니다.
8,000m 14개를 세계최초로 오른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 역시 아콩카구아를 찾았고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산악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높이로 보면 히말라야의 이름 없는 작은 봉우리에도 못 미치지만 ‘안데스의 최고봉’이라는 자리매김이 세계적인 산악인을 불러 모은 것입니다.
거기에는 ‘Seven Summit’라는 이벤트 같은 흐름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지구를 구성하는 7대 대륙의 최고봉을 오르려는 욕망은 에베레스트를 오른 산악인에게는 어려울 게 없으므로 국내를 대표하는 산악인들도 Seven Summit 행렬에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은 영국만큼이나 대단한 산악 국가입니다. 영국에는 2,000m가 넘는 산조차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알프스 시대를 열었고 히말라야 시대를 열었습니다. 영국인들이 대항해 시대의 주인이 된 건 그런 도전정신 때문이 아닐런지요,
대한민국도 강한 도전정신을 가진 나라입니다. 8,000m 봉우리를 오르는 일은 대단히 고되고 오랜 인내와 인생 전부를 바쳐야 하는 일입니다. 그곳에는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에서 설명할 수 없는 열망이 끓어오르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한국은 그런 위대한 산악인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배출한 나라입니다.
박영석, 엄홍길, 한왕용, 오은선, 김재수, 김창호 등 6명이나 됩니다. 그 중 오은선 씨는 세계최초 여성 완등자이기도 합니다. 14좌 등반자 중 우리에게 익숙한 박영석, 엄홍길, 한왕용 씨는 우리 생각과 달리 열정 하나로 어려움을 이겨낸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웃도어 시장이 크지 않아 원정경비를 조달하기 어려웠던 시절 산악인들은 알파인 가이드 협회라는 전문 등반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일반인들도 고산등반의 꿈을 이루수 있게 도와주는 특별한 전문회사였으며 산악인들에게는 오직 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원정대를 꾸릴 만큼의 자금이 마련되면 나의 산을 찾아 떠나며 이어간 10여 년의 세월 속에 8,000m 14좌가 이룩된 것입니다.
8,000m 정상 어딘가에는 거부할 수 없는 향내가 있는 가 봅니다. 8,000m 14좌의 대업을 이룬 산악인 중 유일하게 박영석 씨만 사망했습니다. 그는 8,000m 14좌를 달성하고도 5대륙 최고봉, 남극, 북극점과 에베레스트를 지칭하는 3극점 등 인류 최초의 그랜드 슬램(Grand Slum)을 달성한 대단한 용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도 산으로 향하려는 욕심을 굽히지 않아 산악계에 가장 어려운 숙제로 남은 에베레스트 남서벽, 안나푸르나 남벽, 로체 남벽을 모르려는 도전에 나섭니다.
그리고 첫 도전 상대인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인생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20세기를 대표하는 모험가 우에무라 나오미를 보는 듯합니다 시간차를 두고 두 명의 모험가는 자신의 명줄이 질긴지 자연의 난관이 단단하지 한판 겨룬 모습이 너무나도 같아서 굽히지 않는 인간의 용기에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에무라 나오미 씨는 수평의 오지에서 뛰어났지만, 수직의 높이에는 박영석 씨가 더 우월해 보입니다. 8,000m 14좌를 오른 뛰어난 등반 이력은 물론이고 인류의 미제로 남은 3대 북벽에 도전하다 승화한 용기가 대답합니다. 저는 1년 산 후배인 박영석 씨를 공항에서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 이룰 거 다 이루었으니 이제 위험한 산에 그만 가시게. ”
“ 산악인이 산에 안 가면 어딜 갑니까? ”
“ 그래도 나이가 있잖나. ”
그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나이는 거부할 수 없지만, 산은 자신이 거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직 산을 거부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산을 꼭 그렇게만 가야 하는 지는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지만 인류는 70억 명이고 대부분 비슷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나름의 이유를 들어 다른 사람을 비슷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박영석 씨는 그저 비슷해지지 않은 산악이었을 뿐입니다. 그를 권리와 의무가 살아있는 젊음의 주체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박영석 씨가 실종되고 나서 어디선가 이런 기사를 본 기억이 납니다.
[박영석 씨가 안나푸르나 남벽을 오를 만큼 거벽 등반에 경험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고산등반과 거벽 등반은 본질적으로 다르고, 박영석 씨는 고산등반에는 탁월하지만, 고산등반보다 난해한 거벽 등반은 경험이 많지 않으니 무리가 아니겠느냐는 것이 나름의 평가인듯합니다.
이론적으로만 본다면 이치에 어긋난 말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논리대로만 되지 않습니다. 열정과 도전이 삶 자체인 존재에게 결과는 언제나 예측을 벗어나기 때문이고 결과란 보통의 상식일 뿐이니, 아름답다는 탄성에 걸맞은 외침 같아 보입니다.
“그대의 행동은 아름답소.”
트레킹 첫날 콘플루엔시아(3,400m) 캠프까지 아콩카구아에 오른 두 명의 용기 있는 산악인을 생각하며 저도 한 걸음 한 걸음 고도를 높여봅니다. 캠프는 풍선 같은 대형텐트가 이곳, 저곳 세워져 있고 작은 돔형 텐트가 촘촘히 세워져 있습니다. 캠프에서 머무는 동안은 거대한 식당텐트에 앉아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데, 따뜻한 차와 비스킷이 제공되고 세 끼 식사가 알차게 제공됩니다. 이것만으로도 고산에 오르는 산악인의 하루 저녁을 훔쳐보는 듯합니다.
아콩카구아의 둘째 날은 남벽을 다녀오는 긴 트레킹입니다. 고전 루트는 아콩카구아를 북변 산 사면으로 오르는 데 반해 남면은 3,000m에 이르는 거대한 절벽이라서 난해한 3대 남벽에 꼽히기도 합니다. 1974년 라인홀트 메스너는 아콩카구아에 옵니다. 그는 역시 범상한 산악인임이 분명합니다. Seven Summit가 목적이었다면 북면으로 오르면 될 일을 남벽 아래에서 몸을 웅크린 채 밤을 지새우고 남벽 초등을 흔적을 남깁니다.
죽음의 북벽인 아이거(Eiger)를 10시간에 단독으로 오르며 고산등반뿐 아니라 거벽 등반에도 뛰어난 산악인임을 알렸지만, 그의 아콩카구아 남벽 초등은 거벽 등반가로서 뿐만 아니라 미지의 세계와 소통하는 탐험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라인홀트 메스너가 걸었을 빙하의 끝단 모래인 지대를 밟아가며 남벽으로 향합니다. 하루에 오가기에는 다소 먼 길입니다. 모레인 지대 상단에 이르니 남벽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버젓이 서 있습니다. 꼴로는 여기서나 전망대인 플라자 프란시아(Plaza Francia 4,100m)에서 바라보나 그냥 보는 것이나 같으니 돌아가자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남벽을 오르기 전 온 정신을 빼앗겼을 그 지점의 전망대를 가고 싶습니다. 저는 단호하게 플라자 프란시아를 볼 것이라고 말하고 전망대로 향합니다.
우리나라에선 고대 산악회가 저 벽을 처음 올랐습니다. 같은 학번의 친구가 그 등반에 참가했었습니다. 한국의 대학산악부는 대단한 집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히말라야로 등반을 떠난 1984년, 선배들은 한 달 월급을 주저 없이 내놓아 2,400만 원을 모아주었고 7명의 대원이 성공하고 돌아왔을 때 가족의 일보다 더 반겨주었던 기억이 뚜렷합니다.
한국을 빛낸 산악인 중 대학산악부 출신이 많습니다. 8,000m 14좌를 오른 6명의 산악인 중 박영석 씨는 동국대, 엄홍길 씨는 한국외국어대, 한왕룡 씨는 우석대, 오은선 씨는 수원대, 김창호 씨는 시립대 산악회 출신입니다.
우에무라 나오미도 대학에 들어와 산악부에 가입하면서 풍랑 많은 인생이 시작됩니다. 그는 메이지대 산악부 출신이며 에베레스트를 올랐을 때 훈훈한 휴머니즘을 남깁니다. 메이지유신 100주면 기념 에베레스트 등반대에 참가한 그는 정상 조에 선발되어 정상을 향해 오릅니다. 그는 정상이 얼마 남지 않은 지점에 도달했을 때 더 이상 오르지 않고 주저앉아 한참을 기다립니다.
뒤에 오르던 동료가 그에게 묻습니다.
“ 우에무라 씨 왜, 정상에 오르지 않습니까? ”
“ 당신은 지난 2년간 에베레스트 등반대를 위해 많은 희생을 했습니다. 당연히 당신이 일본 최초로 정상에 올라야 합니다. ”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함께 정상에 올랐다고 합니다. 이런 산악인의 휴머니즘은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와 텐징 노르게이(Tenzing Norgay)의 정상등정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과 대답에서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기자들은 누가 먼저 올랐는지, 세월이 지나서도 행사 때마다, 심지어 한 사람이 죽은 후에도 남은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고 둘은 죽을 때까지 같은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올랐다. ”
산은 오르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준다고 합니다. 저는 아콩카구아 남벽을 향해 걷는 내내 남벽에 묻습니다. 아니 저에게 묻습니다. 산은 나에게 무엇을 주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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