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집에는 열대어 수족관이 2개 있다. 보통사람은 한 개도 관리하기 어려운 수족관을 두 개나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긴 하다.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게으른 사람은 수족관을 운영하기 어렵다. 이건 단언할 수 있다. 또 동물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약한 분이라면 쉽게 뛰어들기 어렵다. 수족관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동물에 대한 애정이 필요해서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귀찮은 수족관을 가지고 있을까? 그 생각은 아름답고 역동적인 물고기들의 움직임을 보면 금방 사라지기 마련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들지 않는다.
수족관의 물고기들은 그런 존재다. 나의 귀찮음과 수고스러움을 한순간에 날려 버리는 그런 소중한 존재. 수족관을 관리하다보면 다소 오만한 생각도 든다. 아니 불손한 생각이다. 마치 창조주가 된 것 같은 그런 느낌.
왜냐하면 수족관에 사는 물고기들에 주어진 모든 생활환경은 오로지 필자의 안목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런 기조 하에 운영되기 때문이다.
물갈이 시기, 돌의 종류와 위치, 여과기 청소 상태, 사료의 종류와 급여량 등 물고기 생존에 필수적이며 절대적인 조건들은 관리자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결정된다. 만약 우리 인간의 생활을 누가 이렇게 관리한다면 인간들은 그 존재를 조물주 혹은 창조주라고 생각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필자는 성어는 물론 치어도 키운다. 이는 지속가능한 수중생태계 마련을 위한 조치다. 마치 비상사태에 대비한 계획이다. 마치 요즘 회자되는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한 작계 000과 비슷한 개념과 비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큰 수조에서 급작스러운 질병의 발생이나 물갈이 실패 등으로 말라위 시클리드 성어들이 모두 죽는 상황이 생긴다면 큰 수조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수조 치어들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작은 수조는 일종의 양어장과 같은 공간이다. 마치 유치원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 작은 수조다.
따라서 물고기들의 대가 집에서 끊기는 일은 필자의 건강이 허락되는 한은 아마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 집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프리카 말라위 호수가 고향인 말라위 시클리드 중 옐로우 프린스라는 녀석들이 절대 다수다. 그런데 지금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들은 대형 마트나 전문 매장에서 구입한 고기들은 아니다.
그 물고기들의 아주 먼 조상들을 마트에서 구입하였고, 그 후 여러 세대에 걸쳐 번식시켜서 지금 물고기들이 되었다.
말라위 시클리들은 입으로 번식을 하는 물고기다. 마우스 브리더(Mouse Breeder)라고 불리는 대단히 독특한 방식을 통해 개체수를 늘리는 모성이 무척 강한 물고기들이다. 물고기들은 자궁이 없어서 많은 치어들이 다른 물고기의 먹이로 대부분 잡아먹히기 마련이다.
그런 위험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말라위 시클리드 암컷들은 입 속에 작은 치어들을 넣고 다닌다. 약 3주 정도가 지나면 주둥이가 터질 것 같고 아래턱이 빠질 것 같은 모습이 된다.
그 시점이 되면 치어들을 어미로부터 분리해낸다. 이런 행위를 열대어를 키우는 사람(일명: 물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알을 턴다”라고 표현한다.
필자의 물고기들은 이런 방식을 통해 번식하고 또 번식한 것이다. 지난 십수 년 동안 이렇게 세대교체를 하면서 물고기들의 명맥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마 5대 이상은 이렇게 흘러간 것 같다.
집 큰 수조의 길이는 125cm이다. 이 수조는 직접 디자인하고 주문하여 맞춤 제작한 것으로 그 속에 들어 있는 모래와 돌도 직접 골라서 넣은 것이다.
필자는 물고기들에게 창조주인가, 아니면 그냥 주인일까, 아니면 시간 맞춰 밥도 주고 물도 갈아주는 인심 좋은 키다리 아저씨 정도일까, 그것도 아니면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일까.
물고기들은 이런 필자의 존재를 과연 인식하고 의식하고 있는 지 정말 궁금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필자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