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나비는 옆집이 말리고 있던 납새미를 물어다 주고는 했다. 그렇게 살갑던 나비는 하지만 어느날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캉스독스 |
고향이 부산인 필자는 어릴 때 생선을 원없이 많이 먹었다. 당시 동네에서 리어카를 끌고 오셨던 생선장수는 작은 종을 딸랑딸랑 울리며 싱싱한 생선이 왔음을 알렸다. 그 생선을 구입하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특히 싱싱한 생선 중 횟감으로 이용 가능한 것은 능숙한 솜씨의 생선장수가 그 자리에서 회로 떠주셨다. 어떤 날은 아침부터 생선구이, 조림 그리고 생선회까지 먹은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인 것 같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아침에 스피츠 빠루를 데리고 산책을 하다보면, 어김없이 재첩국 아줌마를 만났다. 재첩국 한 그릇은 전날 약주를 하신 아버지에게는 최고의 해장국이었다. 나도 옆에서 한 모금 얻어 마시고 빠루에게도 재첩 몇 개를 건져 주기도 하였다.
부산에서의 옛 추억을 더듬다 보면 이웃집 납새미는 자기 것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했던 납세미 도둑 나비가 생각난다. 나비는 스피츠 빠루 못지않게 어린 시절 많은 추억을 안겨준 소중한 고양이다.
나비는 무척 애교가 많은 고양이었다. 요즘 말로 개양이 혹은 개냥이라고 부르는 고양이였다. 나비는 주인에게 살갑지 않은 다른 집 고양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람에게 안기는 것도 좋아했고, 몸도 잘 부비고 다녔다.
1970년대는 부엌이 방이나 거실 같은 실내 공간에 붙어 있지 않았다. 요즘은 부엌이 아파트 실내 공간 안으로 들어왔지만 당시만 해도 부엌은 아궁이와 함께 방과는 다른 별도의 실내공간에 있었다. 부엌에는 부뚜막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겨울이 되어 추워지면 나비는 하루 종일 그 부뚜막에 몸을 감아서 웅크리고 있었다.
지금처럼 고양이 사료를 팔지 않던 시절인 당시에는 어머니가 직접 고양이 밥을 만들어 주셨다. 어머니는 나비가 좋아하는 생선을 밥과 함께 푹 끓여 식사로 주었다. 주로 생선 아저씨가 공짜로 준 생선 대가리와 가족들이 먹다 남긴 내장을 넣고 끓인 죽이었다. 나비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자기 밥을 무척이나 맛있게 먹었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이었다. 당시 잠을 깨면 세수를 하고 빠루의 집으로 가서 잘 잤는지 확인을 하고 다시 부뚜막으로 가서 나비를 찾았다. 그날 아침도 빠루는 보통 때와 같이 잘 자고 일어나서 한바탕 아침 인사를 같이 했다. 그런데 부뚜막에 가보아도 고양이 나비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 나비가 어디 갔어요?"하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슬픈 얼굴로 "나비는 갔단다. 이제 앞으로 보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믿을 수가 없어서 아버지에게 다시 물어 보았더니 아버지도 정색을 하면서 "조금 전 햇볕 잘 들어오는 곳에 나비를 묻어주고 왔단다. 나비가 쥐약을 먹고 죽은 것 같다."라고 대답하셨다.
당시 쥐가 많아 집집마다 쥐약을 부엌 근처에 놓곤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비를 더 이상 못 본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때의 충격이란 다시 생각하기 싫다.
몇 년 전 지인이 운영하는 정읍의 한우목장을 지키던 진돗개 평화가 쥐약을 먹고 죽었다는 비보를 접했다. 그 때 잠시 멍해졌다. 기억의 저편에 아련히 있던 납새미 도둑 나비의 죽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평화는 우리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는 개였다. 아이들은 영리하고 아름다운 진돗개 백구 평화를 보고 나중에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가면 평화같이 예쁜 진돗개 백구를 꼭 키우자고 한 적이 있었다.
이제 하늘나라에서 별이 된 나비와 평화. 두 녀석의 명복을 빌고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