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도착지는 모두가 같다.
말을 타고 갈 수도 있고, 차로 갈 수도 있다.
둘이서 아니면 셋이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감성적 언어의 마술사로 불리는 헤르만 헤세(1877~1962)의 ‘혼자’라는 제목의 싯구절이다. 인간의 삶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이 보다 더 압축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 살아가는 방법이야 제 각각이겠지만, 그 귀결점은 하나로 통한다는 사실이 큰 울림으로 다가 온다.
울림이 지나치면 때론 엄중해 진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엄중함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외롭지 않게 재미를 추구하는 삶은 무엇일까, 고민한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은 <혼자> 보다는 그 누구와, 어떤 대상과 함께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상대로 반려동물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 동물을 가족으로 맞이한 사람들이 늘고 있고, 국내에서는 그 수를 대략 1000만 명 안팎으로 추산하고 있다.
사람과 동물이 함께하는 반려가족이 늘면서, 둘 다 행복할 수 있다면 최선이다.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 만도 않다. ‘혼자’보다 못한 ‘함께’가 있기 때문이다. 함께 살다가 주인에게 버림받는 유기동물이 매년 10만 마리 가량으로 추정되고 있다.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유기될 잠재성까지 감안한다면 그 심각성은 이미 정도를 넘어섰다.
이제라도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동물의 유기를 근본적으로 없앨 수는 없겠지만, 그 수를 줄이는 노력은 필요하다. 우선 사람의 생각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사람이 동물과 함께하는 삶에서 진정 ‘반려’를 생각하고, ‘함께’하는 행복을 꿈꾼다면, 일방적인 관계보다 동물의 입장에서 그들의 행동심리를 이해하고, 생각하는 마음가짐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동물을 입양해서는 곤란하다.
‘동물을 깨닫는다(Animal Wise)’의 저자 버지니아 모렐은 “‘동물이 (과연) 생각할까’에서 ‘동물은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로 인식이 바뀌어야만 진정으로 사람과 동물의 반려관계가 만들어 진다”고 주장한다. 관심과 애정이 보약이란 얘기다.
헤세는 그의 대표작 ‘데미안’에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고 표현했다. 여기서 ‘새는 자신이고, 알은 스스로의 마음을 닫았던 과거’라는 게 일반적 해석이다. 이제 동물을 바라보는 관점도 과거로부터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 것이 진정 ‘함께하는 삶’의 출발점일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