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대 전 교수 이성희 수의학 박사
군사정권시절 교도소에서 동료 재소자를 살리는 삶을 산 수의사의 이야기가 무대 위에 올려진다.
구로문화재단과 바닥소리는 다음달 제2회 바닥소리극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총 세 편의 1인 창작 판소리극을 공연한다. 6월16일부터 18일까지 '광주교도소의 슈바이처, 닥터 2478'로 시작한다.
제목과 달리 슈바이처는 의사가 아니다. 수의사다. 현재 92살의 고령인 이성희 전북대 전 교수를 모델로 했다.
이성희 전 교수는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수의사였다.
1945년 3월 이리농림학교 수의과 졸업. 수의사 면허 번호 417번.
전북대 수의과 교수. 동경대 박사. 1974년 당시 전북대 교무처장. 차기 전북대 총장감.
하지만 하루 아침에 그는 간첩으로 몰리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1974년 3월 박정희 군사정권은 울릉도 간첩단 사건을 발표한다. 재일교포 사업가를 간첩으로 몰아가는 과정에서 울릉도 출신 월북자가 고향을 방문한 사실이 튀어 나온다.
이것이 빌미가 돼 울릉도 주민 20여명이 간첩으로 몰린다. 비슷한 시기 타지역 출신자들까지 엮이면서 연루자만 47명에 달하는 대형 간첩단 사건으로 비화한다.
47명 가운데 3명이 사형 당했다. 지난 2006년 출소자가 진실화해위원회에 조작된 것이라며 진상규명 신청을 했고, 2012년 법원은 이를 인용한다. 이렇게 해서 간첩조작사건으로 판정을 받게 된다.
이성희 교수는 1962년 일본 유학시절 북한을 3박4일 동안 방문했다는 사실이 빌미가 돼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북한 방문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던 1960년대,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 산다는 소식을 듣고 호기심에 방문한 것이 인생을 이렇게 바꿔 놨다.
이 교수는 2012년 모든 간첩죄 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단순 잠입과 탈출은 인정돼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CBS 집중 인터뷰 - "울릉도 1974" 펴낸 최창남 목사 참고)
1년 여의 재판이 끝난 뒤 그는 광주교도소에 수감된다. 처음에는 세탁장 노역에 동원됐다가 교도소 측에 의해 동료 재소자 진료에 투입된다.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지리산 공비 출신 등이 수감돼 있었고 시설은 열악했다. 형식적인 왕진만 있었을 뿐 재소자들이 제대로된 진료를 받기는 어려웠다.
재소자가 죽어 나갈 경우 제재를 받는 교도관들이 급한 김에 수의사인 그에게 동료 재소자 진료를 맡기려 했던 것이었다.
물론 의사처럼 처방과 수술까지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수의외과 전공자로서 응급처치와 외부진료가 반드시 필요한 재소자들을 교도소에 알렸다.
처음 시작은 이랬지만 광주가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 되면서 그의 마음도 바뀌었다.
그는 양심수로서 동료 수감자를 위해 단식도 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동료 재소자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진료했다.
이런 뜻하지 않은 사람 진료는 1991년 광주교도소에서 출소할 때까지 있었던 15년간의 광주교도소 수감생활 내내 이어졌다.
1991년 출소 뒤에도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복권이 되지 않아 생계수단을 찾아야 했고, 수의사 면허는 취소되지 않은 것을 알고 강원도 인제의 닭을 도축하는 도계장에서 검사원으로서 일했다.
그러다 2012년 재심에서 간첩죄 무죄 결정을 받고 복권됐다.
40에 수형생활을 시작, 60이 다 되어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됐고, 80대 중반에서 복권됐지만 한 때 전북대 총장감이라던 그의 인생은 되돌릴 수 없었다.
그는 지난해까지도 도계장에서 일했다. 일을 그만두고 현재는 서울에서 살고 있다.
이성희 교수는 노트펫과의 통화에서 "광주교도에 가서 나보다 불쌍한 사람이 많다는 것 알게 됐다"며 "봉사를 좀 했다고나 해야할까요"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한편 카카오 스토리펀딩에서 공연비용 마련을 위한 펀딩이 진행된다. 이 교수의 광주교도소 수감시절의 이야기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