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김용민/비즈니스 워치 |
우리나라 옛날 인물 중에 오이를 아버지로 태어난 인물이 몇몇 있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는 속담도 있고, 길 가던 소도 웃다 넘어질 것 같은 변명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아이를 낳고 보니 아버지가 오이라는 것이다. 오이를 부친으로 삼아 태어난 인물이 신라 말기, 풍수지리설의 대가인 도선국사다.
신라에 최씨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 집 앞마당에 큰 오이가 열렸다. 딸이 몰래 오이를 따먹었는데 임신을 해 아들을 낳자 부모가 아비 없이 낳은 아이라며 숲에 버렸다. 딸이 몰래 숲에 가보니 비둘기가 날개로 아이를 덮어서 키우고 있었다. 이를 보고 보통 아이가 아니라고 여겨 다시 데려다 키웠다. 이 아이가 자라 승려가 돼서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을 예언한 도선국사였다. 그저 떠돌아다니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기록이다.
오이와 관련된 출생 일화를 갖고 있는 인물이 또 있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최응(崔凝)이다. 모친이 최응을 임신했을 때 집에서 키우던 오이 줄기에 참외가 열렸다. 이상하게 여긴 이웃이 궁예에게 고발하니 불길한 징조라며 아이를 낳으면 버리라고 했다. 하지만 최응의 부모는 아이를 몰래 키웠고 이 아이가 커서 대학자가 되어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했다. 이 설화 역시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고려사’에 실려 있는 기록이다.
옛날 사람들 이상하다. 오이를 먹었더니 아이가 생겼다는 것인데 현대인들은 야릇한 상상부터 할 지 모르겠지만 옛 사람들은 진지했다. 오이에 힘을 북돋아주는 요소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오이를 생식의 상징으로 삼았다. 표현 방법만 다를 뿐 동서양의 인식이 거의 비슷하다.
성경에도 오이는 힘을 돋우는 채소로 표현되어 있다. 이집트를 떠나 사막을 떠돌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먹었던 오이, 수박, 부추, 양파, 마늘을 그리워하는 장면이 구약성경 민수기에 보인다. 모두 먹으면 힘이 솟고 정력에 좋다는 채소로 이집트에서 피라미드 건설 노동자에게 특식으로 먹였다.
1세기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우스 역시 ‘박물지’에 오이 즙이 여성의 생리를 촉진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적었다. 과학적인 검증 여부를 떠나 옛날 서양에서도 오이가 생식에 좋다고 믿었던 것이다. 처녀가 오이 먹고 아이를 낳았다는 우리 이야기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
오이와 출산 그리고 생명력의 상관관계는 현재 우리가 쓰는 말에도 흔적이 남아 있다. ‘과년’이라는 단어다. 과년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한자로 과년(過年)은 나이가 들어 혼기를 놓쳤다는 뜻이고 과년(瓜年)이라고 하면 결혼 적령기의 여자라는 의미다.
과라는 글자 가운데를 자르면 팔(八)과 팔(八)이 되는데 더하면 이팔청춘 열여섯으로 옛날에는 여자가 결혼할 나이였기에 생긴 뜻이다. 열여섯을 파과기(破瓜期)라고도 하는데 생리를 시작하는 나이라는 뜻이니 곧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시기, 어른이 되는 나이라는 뜻이다. 오이가 생명력과 관련 있기에 만들어진 용어일 것이다. 요즘 오이가 제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