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는 한자로 食口다. 먹을 식에, 입구. 함께 먹어야 식구다.
두 그림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와 '부엌의 모습'은 르네상스 시절에 인간과 식구가 된 냥이와 멍이를 보여준다.
멍이와 냥이는 식당을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공유한다. 여러 이유로 식구가 아닌 가족도 있다.
기러기 아빠는 식구가 아니다. 그래서 외롭다. 멀리 있는 친척은 이웃사촌만 못하다 했다.
이웃은 가끔은 먹을 것을 나누는 식구다. 멍이와 냥이는 르네상스말기에 우리들의 가장 가까운 가족인 식구로 등장한다.
자코포 바사노(1510/18-92)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 1537년, 캔버스에 유채,250x235, 이탈리아 파도바 치타델라 성당 |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는 신약성경 내용 중 가장 많이 그려진 주제중 하나다. 예수가 부활해 제자들 앞에 나타난(누가복음 24장) 내용이다.
처녀의 몸으로 임신하는 성모마리아(수태고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예수의 부활, 최후의 심판은 중세부터 르네상스까지 교회가 가장 선호한 그림의 주제다.
부활한 예수와 제자의 만남이라면 좀 더 엄숙하고 긴장감이 감돌만 하다. 그러나 긴장감은 찾아보기 힘들다.
도리어 평온해 보인다. 그림은 어느 평범한 가정의 일상처럼 보인다. 사람의 발치에 누워 있는 멍이는 노곤한 저녁의 느낌을 준다. 무엇인가 기회를 엿보는 양이의 모습이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음식점 주인으로 보이는 왼편 아제의 늘어진 배는 그림의 현실성을 배가 시킨다.
내 배를 보면서 그림속의 배의 부피감과 기울기를 따져보게 한다. 현실성이 있다.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풍속화로 담기를 선호한 자코포 바사노는 성당에 걸리는 종교화도 저자거리의 풍경으로 묘사했다.
예술사학가 야곱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를 “인간과 세계의 발견”으로 불렀다. 르네상스는 인간만 발견한 게 아니라 냥이와 멍이도 발견했다.
중세의 냥이는 마녀 또는 매춘부의 상징이었다. 이제는 식구로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함께하는 ‘그냥’ 냥이가 됐다.
멍이도 주인을 돋보이게 하고 침대위의 정절을 지키는 상징이 아닌 ‘그냥’ 개가 된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가 경제적으로 부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십자군원정 이후 피렌체,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동서간의 교역을 통해 큰 부를 축적했다.
빈첸초 캄피는 '리코타 치즈를 먹는 사람들' '과일장수' 등 먹거리 그림을 많이 그렸다. 다양하고 풍성한 먹거리가 많았다는 증거다.
빈첸초 캄피의 '부엌의 모습'은 당시의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 부엌 저 멀리 흰 보로 덮인 식탁이 보인다. 잔치를 준비하고 있다.
멍이와 냥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기를 잡는 남자들의 모습. 잡은 고기를 손질하고 빵을 준비하는 여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다들 뭔가에 몰두하고 있다.
그림 앞에는 고기 내장을 두고 아웅다웅 다투는 냥이와 멍이의 모습이 보인다.
“아유 요것들”하며 고기를 손질하는 아낙이 귀엽다는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는 느낌이다.
빈첸초 캄피(1536-91) '부엌의 모습' 1585년경, 캔버스에 유채, 220x145,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소장 |
멍이와 냥이의 대화 내용을 들어보자.
멍이;“냥이야 나눠먹자. 같은 식구잖아.”
냥이;“뭔 소리야, 너랑 나랑은 격이 달라. 네가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인간들이 나에게는 집사야, 집사!”
멍이; “무슨 소리야, 너나 나나 다 같은 반려동물인데. 동물차별 하지 마!”
냥이;“같은 반려동물! 개소리 그만해!”
멍이;‘워매 개소리!“
냥이가 이처럼 기고만장한 이유는 조상에 있다. 이집트에서 신으로 숭배 받던 시절이 있었다. 다음에는 신으로 숭배 받던 이집트의 고양이를 찾아가 보자.
칼럼 연재
칼럼 완결
기행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