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펫] 오늘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늘 보는 그런 개성만점의 양이들을 만나 보겠습니다. 신화나 성경 이야기의 주요장면에 등장하지만, 주제와 관계없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장난을 치고, 외부인을 경계하는 양이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첫 번째 그림은 페트루스 크리스투스의 <성모자>입니다. 그는 얀 반 에이크의 제자로 알려졌습니다. 플랑드르 지방 사람들의 삶을 세밀한 묘사로 표현한 얀 반 에이크의 화풍을 그대로 이어 받았습니다.
이 그림도 성모마리와 예수님을 그리면서 당시의 가정집 풍경을 세세하게 그렸습니다. 창문 밖으로는 도시의 풍경도 보입니다. 성모 마리의 표정과 천진난만한 아기 예수의 표정이 평온하고 따뜻해 보입니다.
ⓒ페트투스 크리스투스(1410-1472/73) 성모자 Madonna and Child Oil on wood 1450년경 38x22cm 토리노 사바우다 갤러리 |
양이에 주목하겠습니다. 양이가 어디에 있는지 보이세요. 그림 뒤편의 벽난로 앞에 느긋하게 앉아 따뜻한 불길을 즐기고 있습니다.
양이가 쥐를 잘 잡아 대접 받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쥐를 잘 잡아 신으로 대접 받거나, 항해의 동반자로 쓰이던 기능인(?)으로 고양이가 아니라, 뭔지 모를 내면적 특성으로 사랑 받고 함께 하는 그런 양이가 등장합니다.
아니 그냥 함께 해서 사랑스러운 그런 양이 말입니다. 양이는 게으름도 매력입니다.
쥐 잡는 기능은 쥐 덫에 맡기고 양이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면 됩니다. 쥐 사냥은 이제 양이의 생업이 아닌 취미가 됐네요.
아래 그림은 핀투리키오의 오디세우스의 귀환(구혼자들과 함께 있는 페넬로페)입니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집으로 돌아오기 위한 오디세우스의 모험과 그를 기다리는 페넬로페의 사랑은 <멍이의 주인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를 참고하세요.
이 그림은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니 재혼해야 한다는 구혼자들의 압박에 대해, 페넬로페가 시아버지의 '수의를 다 짜면 재혼하겠다'는 핑계를 대며 수의를 짓는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밤이 되면 수의를 다시 풀기를 반복하며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를 기다립니다. 항구에는 배가 정박해 있고 구혼자들의 뒤편에 거지 차림의 오디세우스가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핀투리키오는 페루지노의 제자로,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 작업을 도우며 그림을 배웠습니다. 종교화가로 위대한 성인들의 삶을 매우 아릅답게 묘사한 화가로 유명합니다. 이 그림에서는 주제를 종교가 아닌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따왔습니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종교적 주제가 아닌 신화가 그림의 주제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림 속 사람들의 의상이나 생활풍습은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인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반영해 이채롭습니다. 화면 전면의 양이도 당시의 고양이 모습이겠죠?
ⓒ핀투리키오(1454~1513) 오디세우스의 귀환 (구혼자들과 함께 있는 페넬로페) 1509년경 캔버스에 부착된 프레스코 152x125.5 런던 국립미술관 |
그림 속에서는 팽팽한 긴장이 흐릅니다. 구혼자들은 왕권을 노리고 페넬로페에 청혼하고 있습니다. 페넬로페는 수의라는 명분을 내세워 이를 미루고 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구혼자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작전을 짜고 있습니다.
왕비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자기의 신분조차 숨긴 상태입니다. 양이는 실타래를 굴리며 마치 “고만들 해, 그런다고 인생 뭐 있냥?”하고 팽팽한 긴장에 여운을 주는 듯 합니다.
줄리오 로마노의 <고양이의 성모마리아>입니다. 어! 제목이 <고양이의 성모마리아>네요. 성모마리아의 고양이가 아니라.
ⓒ줄리오 로마노(1499-1546) <고양이의 성모 마리아> 1522-1523 목판에 유채 172x144cm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 |
줄리오 로마노는 라파엘로의 제자입니다. 라파엘로는 <초원의 성모> <도요세와 함께 있는 성모> 등 마리아와 아기 예수 세례요한이 함께 있는 명작을 남겼습니다.
줄리오는 그 제자답게 스승이 인물들을 안정된 삼각형 안에 배치하는 피라미드 구성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여기에서는 세례요한의 어머니이자 마리아의 사촌인 엘리자베드가 함께 있습니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모습입니다.
그림 주변에 있는데도 양이에게 시선이 쏠립니다. 양이가 “허튼 짓 하지 마” “내가 지켜보고 있어”라며 그림 밖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듯 합니다. 평화의 수호자, 마리아의 기사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고양이의 성모마리아>라는 제목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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