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펫] 개를 좋아하는 필자에게는 개와 관련된 ‘트라우마’(trauma)가 하나 있다. 트라우마는 의학전문용어로 원래 '외상(外傷)'을 뜻하지만, 원래 뜻보다 ‘정신적인 외상’ 또는 ‘정신적인 충격’의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필자는 1970년 중후반 초등학교를 다녔다. 당시는 동물보호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지 못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공공연하게 동물을 괴롭히거나, 심하게 학대하는 일이 빈발하게 일어났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날 오후도 여느 날과 다름없는 화창한 날이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미세먼지가 없어서 비가 오지 않으면 하늘은 늘 화창했다.
초등학교 정문에서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전봇대가 있었다. 보통은 그 전봇대를 기준으로 우회전하여 집으로 갔다. 그날 하굣길에도 전봇대 사이를 통과하려 했다.
그런데 익숙한 전봇대 앞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개 한 마리가 전봇대에 묶인 상태에서 피를 흘리며 축 늘어져있었다. 그 개는 너무 많이 맞아서인지 신음소리도 내기 어려워보였다. 그 개의 얼굴이 보였다.
너무나 익숙했다. 동네 아이들과 장난도 잘 치던 주인 없는 동네 개였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아끼던 소시지를 먹인 개였다. 그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리가 떨려 제대로 서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용기를 냈다. 개를 위해서 그리고 양심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피 묻은 몽둥이를 든 아저씨에게 “제발 개를 그만 때리고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그 분의 대답은 지극히 차가웠다.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집에 빨리 가라.”는 것이었다.
그 아저씨에게 애원할 당시에도 개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죽음이 임박한 그 개의 눈과 마주쳤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절망감이 밀려왔다. 그 개의 눈빛을 떠올리면서 집에까지 뛰어왔다. 오는 내내 울었다. 아무리 참으려 했지만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전봇대가 있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약간 멀어도 좀 돌아서 집으로 갔다. 다시 그 전봇대를 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노트펫에 올라온 기사 두 편을 읽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동안 잊고 있던 수십 년 전에 겪었던 악몽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먼저 작성된 한 편의 기사는 “중년 남성이 길을 배회하는 유기견을 지인들과 잡아먹기 위해 불법 개조 공기총으로 쏴서 죽이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속보(續報)에는 “총을 쏜 장소는 어린이집 인근이었고, 그 개는 머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다행히 구조되어 수술대에 올랐다.”는 내용이었다.
과거의 악몽과 내용상으로 다를 것이 없었다. 피 묻은 몽둥이가 불법 개조 공기총으로 바뀐 것 외에는 본질적으로 같은 사건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개를 잡은 중년의 아저씨들은 약간의 개고기를 얻기 위해 아이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무자비한 폭력을 개에게 가한 것이다. 그리고 그 분들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다수의 아이들에게 평생 잊지 어려운 끔찍한 악몽을 주었다.
40여 전에는 없던 동물보호법은 동물학대를 근절하기 위해 벌칙조항까지 두고 있다. 하지만 동물보호법은 이번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현실 세상에서 너무 먼 곳에 있는 것 같다. 관련 당국은 법이 현실에 어떻게 정착할지 깊은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동물보호법 덕분에 다시는 이번 사건과 유사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크게 다친 이름 없는 개의 빠른 쾌유를 기원한다.
미주리에서 캉스독스(powerranger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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