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는 나일강을 따라 문명을 일구었는데, 그 중심이 상류의 룩소르와 하류의 멤피스입니다. 이렇듯 각기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존재했던 왕국은 기원전 3,000년경 나르메르왕에 의해 통일되고 그로부터 찬란한 파라오시대를 열어갑니다. 역사적인 분류로 보면 고왕국시대라고 하지요. 거대한 피라미드가 대부분 고왕국시대에 만들어진 건 파라오의 힘이 그만큼 막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파라오의 권위와 문화가 시작된 곳이 룩소르입니다. 룩소르에서 카르낙크 신전과 룩소르신전을 탐방하며 다시 5,00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봅니다.
이집트는 툭하면 지금으로부터 3~4,000년 전이지만 룩소르는 특히나 더합니다. 그것은 이집트 문화의 시작이 룩소르이기 때문입니다. 카르나크 신전은 룩소르의 지방신인 아몬과 태양신인 라를 모시는 곳이어서 가장 신성한 장소로 여겨집니다. 역대 파라오들은 자신의 권위를 신에게 의지했기 때문에 이 곳에 오벨리스크와 신상을 세워 신을 경배했죠. 거대한 기둥이 덩그러니 선 대열주실은 특히 압권입니다. 그보다 더 우리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건 뭘까요? 하나의 돌로 된 거대한 조형물 오벨리스크입니다.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의 신비가 지구촌 곳곳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리는 척도이기도 합니다. 카르낙크 신전에서는 3개의 오벨리스크가 세상 밖으로 나갔는데, 그 중 하나는 워싱턴 백악관 앞에 자리잡아 미국의 상징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자리잡아 태양의 제국시대 영국의 상징물이 되었고, 또 다른 하나는 이스탄불에 자리잡아 오스만제국 뿐 아니라 이슬람전체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보통 22m 길이의 거대한 탑 오벨리스크는 사방의 방향을 가리키는 정사각형 탑으로 정수리는 하늘을 향하게 하여 형이상학적 5방을 추구하는데, 이는 태양신 아몬-라를 향한 기원이기도 합니다. 온전히 남은 가장 큰 오벨리스크, 합세수트 오벨리스크를 보노라니 이렇게 무거운 돌을 어찌 가져갔을까 궁금해집니다. 그래도 여기 룩소르에 모아놓기 보다 탈취든 강탈이든 지구촌을 대표하는 명소에서 다시 빛을 발하니 이를 헌정한 파라오도 기뻐하겠지요.
카르낙크 사원 다음으로 룩소르 신전을 가봅니다. 룩소르 신전은 아몬 대신전의 부속신전으로 지어진 것이지만 건축왕 람세스 2세의 사원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첫 대문부터 람세스의 좌상이 맞이하고 사원 곳곳에 그의 좌상이 즐비하니 그가 지었고 그를 위한 사원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건축왕으로 불린 왕이 있습니다. 그 분들이 왕성하게 활동한 덕에 당시엔 많은 사람들이 피곤했겠지만 후대 자랑거리를 남깁니다. 중국의 진시왕, 인도의 샤자한, 프랑스의 루이 14세, 잉카의 파차쿠팩, 이집트에서는 람세스 2세입니다.
룩소르 신전 |
람세스 2세는 세계적으로 기억될 만한 기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36명의 부인에게서 낳은 자식은 아들이 94명, 딸이 103명에 달합니다. 그가 자식얼굴을 다 기억이나 할까요? 중국엔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대단한 정력가로 많은 비와 첩을 두었고 그 여자들로부터 83명이나 되는 많은 자식을 두었습니다.
하루는 이세민이 장안성을 산보하는 데 두 아이가 싸우는 것을 봅니다. 한 아이는 얼굴이 익어 ‘아하, 내 아들인가 보다’ 했는데, 다른 아이는 기억에 없었습니다. 감히 자기 아들과 싸우는 놈이 있다니. 이세민은 달려가 손 방망이를 날렸답니다. “이 애가 누구 자식인줄 알아?” 그랬더니 이 애가 맞은 데를 어루만지면 대답했다죠. “저도 자식인데요.”
그 보다 한 수 위인 람세스 2세는 자식들에게 꼬리표를 달게 하지는 않았을까요? 룩소르 서쪽 왕가의 계곡에 가니 람세스 2세의 지하무덤이 있습니다.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지하무덤의 단면도엔 200여명의 자식들이 미라로 안치될 방이 가지런하게 만들어져 있더군요. 죽어서도 자식을 책임지려는 대단한 아버지임에 분명합니다. 람세스는 그 외에도 하나의 기록을 더 가지고 있습니다. 무려 93세까지 장수하며 67년이나 왕의 권위를 즐긴 권력가입니다. 67년간 왕의 자리를 누린 것으로도 세계적인 기록이라고 합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한 평생이 넘는 긴 세월이지요.
룩소르신전에서는 2개의 오벨리스크가 세상으로 나가 빛을 발한답니다. 정문에 마주선 두 개의 오벨리스크 중 우측에 받침대만 남기고 사라진 오벨리스크는 지금 파리의 콩고드 광장에서 파라오의 존재를 밝히는데, 이 오벨리스크는 당시 이집트의 술탄인 무하마드 알리가 나폴레옹이 오스만 세력을 몰아내자 감사의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영국과 인도를 연결하는 고리인 이집트를 점령한 것 뿐인데, 이집트 사람들은 순수하게도 해방군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입니다. 여하튼 나폴레옹은 답례로 커다란 시계를 주었다지요. 중국 자금성에 가도 시계박물관이 있을 정도로 미개한 왕들은 시계를 꽤나 좋아한 듯 합니다.
룩소르 신전에서 사라진 다른 하나는 로마의 중심지에 있답니다. 지구촌을 대표하는 곳에 왜 오벨리스크를 그렇게 열심히 가져가 세웠는지 아이러니하기만 합니다. 그것도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것인냥 자랑하니 말이죠. 그러고 보니 작년에 가본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도 도시의 상징으로 가짜지만 오벨리스크가 서 있습니다. 오벨리스크는 이집트가 낳은 파라오문화의 꽃입니다. 지구촌은 파라오 문화를 스스럼없이 지구촌의 자랑으로 받아들인 듯 합니다.
나일강 크루즈는 룩소르에서 애스원으로 향하는 여행은 5일간이고 애스원에서 룩소르로 향하는 여행은 4일간입니다. 우린 애스원으로 향하는 크루즈선에 올랐습니다. 크루즈선은 호텔 같은 편안한 방에 화장실과 욕실이 딸려있고, 하루 3끼니 식사, 하루 한 번의 티타임 등 먹거리가 풍족합니다. 또 모든 방은 강을 조망하는 lake view입니다.
갑판엔 수영장과 휴게시설도 갖추어져 있습니다. 저는 처음 타보는 크루즈라서 설레기만 합니다. 애스원으로 향하는 크루즈선은 첫 날은 출항하지 않고 둘째 날 오후 2시 크루즈를 시작합니다. 룩소르에 머무르는 첫 날은 카르낙크 신전과 룩소르 신전을 탐방했으니 다음 날 오전엔 왕들의 비밀무덤을 찾아 왕가의 계곡을 찾아갑니다.
왕들은 자신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걸 두려워해서 감추려 하지만 그 누구도 비밀로 남지 못했습니다. 룩소르의 왕가의 계곡 이야기는 카이로 재래시장에 나온 골동품을 보고 이를 알아본 이집트 고고학자 하위즈 카터에 의해 시작됩니다. 그는 물건을 판 사람을 구슬려 룩소르의 오아가의 계곡을 알아냅니다.
영국인에겐 신기한 일이었겠지만 동네사람들이 몇 천년동안 필요할 때면 무덤을 파고 들어가 금과 은을 들고나와 녹여서 엿도 사먹고 식량도 사고 그랬겠지요. 그는 흥분해서 발굴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사업가인 로드 카르나본이 발굴자금을 대줍니다. 그런데 드러난 무덤은 모두 도굴되어 가져갈 부장품이 하나 없었습니다. 실망이 컸습니다. 도둑놈이기는 마찬가지여서 더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희망과 기대가 꺾이려는 때, 당나귀가 돌에 다리가 걸려 다리가 부러집니다. 꾸민이야기 같지만 투탕카멘의 무덤은 그렇게 세상에 나옵니다. 그런 이야기는 또 있지요. 카톨릭의 가장 귀한 보물 사해문서는 양이 찾아냅니다. 목동은 동굴로 들어간 양을 잡으러 따라 들어갔다가 둘둘 말린 양피를 발견했으니 정말 기가막힌 우연입니다. 그러나 우연이라기엔 너무 기가막혀 이를 영적 안내라 표현하면 어떨까요? 세상에 나올 때가 되었을 때 섭리자의 안내에 의해 세상에 다시 나온 인류의 선물이라는 것이죠.
여하튼 카터는 무덤의 문을 열지 않고 영광을 같이 나누기 위해 후원자인 카르나본에게 연락하고 그는 그 즉시 룩소르로 달려옵니다. 그렇게 몇 일을 기다린 후 3명이 투탕카멘의 무덤을 엽니다. 고고학자인 카터와 후원자인 카르나본, 그리고 이를 기록으로 남긴 촬영기사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곧 한 명씩 죽음을 맞이합니다.
후원자 카르나본은 카이로로 돌아가자마자 고열에 시달리다 말라리아로 사망합니다. 카터는 투탕카멘의 부장품, 특히 투탕카멘 마스크를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간 후 얼마되지 않아 바이러스에 감염되 죽게 됩니다. 이를 알게 된 사진사는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정신분열증세를 보이지요. 그러다 그 역시 교통사고로 사망합니다 .신문은 이를 놓치지 않고 대서 특필하여 온 세상에 투탕카멘의 저주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지요.
투탕카멘은 어린 나이에 파라오가 되었으며, 19세에 사냥을 나갔다가 낙마로 인한 후유증으로 사망합니다. 다리가 부러졌을 만큼 큰 부상이었으니 염증이나 감염에 의해 사망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여튼 투탕카멘은 어린 나이에 죽었고 권력을 쥐고 있던 최고 신관의 지시에 따라 그의 지하무덤과 부장품이 만들어집니다.
파라오는 자신이 파라오가 되는 순간부터 내세에 살 무덤을 건축하고 부장품들을 준비합니다. 그럴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한 투탕카멘의 무덤이라 가장 보잘것 없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부장품과 특히 120kg이나 되는 순도 높은 황금마스크는 세상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고 다른 지하무덤의 규모를 상상하게 했습니다.
왕가의 계곡엔 66개의 지하무덤이 있고 54명의 파라오가 묻혀있다고 합니다. 실로 거대한 무덤군이지요. 입장권으로는 3곳의 무덤 방문이 허용됩니다. 지하무덤은 모두 상형문자와 벽화가 긴 회랑을 장식해 아름답습니다. 그 중 람세스 4세 무덤이 특히 아름답습니다.[/column] 이 무덤엔 카톨릭 성화도 벽에 그려져 있는데 곱트교 수도사들이 그렸다고 합니다.
451년에 열린 칼케톤 공회이후 로마카톨릭과 이별하고 이집트 정교로 발전한 곱트교는 이후 로마카톨릭의 박해를 받습니다. 이를 피해 수도사들이 왕가의 계곡으로 숨어들었고 이들은 지하무덤에서 기거했답니다. 갑파도기아가 로마의 압박을 피해 지키려한 로마카톨릭의 순수였다면 세상의 주인이 된 로마카톨릭은 같은 오류를 범했고 그로인해 생겨난 역사의 현장입니다. 람세스 9세의 무덤을 들어가보니 천장이 온통 새카맣습니다. 이 곳 역시 지하무덤에 피신한 곱트교 수도사들이 피운 불에 그을렸답니다. 이것도 역사지요. 보존할 유물이 하나 사라졌다고 애석해하기보다 그 자체를 받아들입니다. 새로운 보존 유물로 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가의 계곡을 나오며 뒤돌아본 게곡은 이집트인들이 믿는 파라다이스였습니다. 계곡 끝엔 피라미드 모양의 봉우리가 앉아있고 계곡은 단단한 석회암 암반지대여서 무덤을 만들고 유지하기 좋은 지반입니다. 거기에 U자 계곡은 입구가 하나고 이 입구를 통하지 않으면 들어오기도 힘들어 보입니다. 요새같이 숨겨진 계곡에서 파라오들은 영생하길 바랬지만 그렇게 오랜시간 편하게 지내지는 못한 듯 합니다.
룩소르 서편의 마지막 탐방지로 합세수트 장제전을 찾아갑니다. 여성이 지배하는 세상은 어떨까요? 중국의 측천무후는 이세민의 첩이었으나 이세민으로부터 외면을 받습니다. 이세민이 워낙 강한 남자이다 보니 그때까진 자신의 마성을 몰랐겠지요. 하지만 그녀는 혈연관계는 없지만 법적으론 자신의 아들인 이세민의 장자 당 고종을 꼬셔 밀월관계를 유지하지요.
차기를 바라보는 야망가의 자질을 충분히 갖고 태어난 여자입니다. 그녀의 손에 백제가 멸망하고 고구려마저 망합니다. 실로 한탄스럽지만 그녀의 능력은 인정해야죠. 그녀는 고종이 죽자 두 아들마저 죽이고 스스로 왕에 오릅니다. 그런 여자가 이집트에도 있으니 역사의 반면교사는 동서고금을 망라합니다.
합세수트는 투트모세스왕의 딸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투트모세스왕은 왕비와의 사이엔 딸만 두 명 있을 뿐 아들이 없습니다. 그 딸 중 하나가 합세수트입니다. 하지만 다른 여자로부터 아들을 하나 얻습니다. 투트모세스 2세입니다. 그는 정실자식은 아니지만 유일한 남자여서 왕위계승권자가 됩니다. 야심가 합세수트는 투트모세스 2세와 결혼을 합니다.
투트모세스 2세와 합세수트 사이엔 2명의 딸만 있고 남자애는 없는 반면 투트모세스 2세의 다른 부인은 아들을 낳습니다. 바로 차기 왕위를 이를 투트모세스 3세지요. 합세수트는 어느모로 봐도 파라오가 될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병약한 투트모세스 2세가 아들을 하나 남기고 젊은 나이에 죽으면서 그녀의 꿈은 현실이 됩니다. 어린 투트모세스 3세의 섭정이 되어 공동 파라오에 오릅니다. 귀족들이 반대할 것을 알고 대신관과 거래를 하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신의 자식인 거죠.
이집트는 다른 가문에서 권력을 잡으면 왕조가 바뀝니다. 그런 식으로 가문이 바뀌며 30여개의 왕조가 들어섭니다. 그런데 파라오들 중에는 수백년의 간극이 생기는 데도 불구하고 람세스라는 칭호를 많이 씁니다. 1세 2세는 보통 아버지와 아들관계여야 함에도 전혀 다른 가문이고 몇 백년이 지났어도 람세스 뒤에 숫자를 붙여 씁니다. 그건 람세스라는 말 자체가 신에 가까이 있는 존재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신의 아들을 상징하는 말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아몬 라의 자식이라고 말하는 파라오의 전유물이지요.
대신관이 합세수트가 람세스라고 선언했다면 그녀가 갖게 된 힘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그녀가 파라오가 되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들은 여자는 수염이 없어서 파라오가 될 수 없다는 이유를 듭니다. 그러자 그녀는 수염을 턱에 붙이면 이젠 되었냐고 응수를 합니다. 수염을 단 역사상 유일한 여성 파라오는 그렇게 탄생됩니다.
그녀의 시신을 분리해 미라로 만들고 장례의식을 치렀을 합세수트 장제전을 걸어나오며 룩소르의 역사탐방을 끝냅니다. 그녀도 오리시스의 저울에 심장을 올려놨을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 저울이 기울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런 상황을 준비한 듯 그녀의 석상은 한 팔에 천국의 열쇠를, 한팔에는 파라오를 상징하는 막대기를 들고 오늘도 자리를 지킵니다.
아프리카 여행기는 '아프리카, 낯선 행성으로의 여행'(채경석 지음, 계란후라이, 2014)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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