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킬 분지를 빠져나와 시미앤으로 가는 여정에는 자연스럽게 악숨과 곤다르를 거쳐가게 됩니다. 아디스바바를 출발한 항공은 악숨, 랄리베라, 곤다르를 거쳐 아디스아바바로 돌아가기 때문에 비행기는 잠시 내려 사람이 내리거나 타고나면 이내 출발합니다. 45인승이지만 셔틀처럼 경유하며 알차게 운행합니다. 악숨에서의 일정이 바쁘지만 시간을 쪼개 악숨을 돌아보았습니다.
악숨은 메넬리크 1세가 세운 왕국의 수도입니다. 악숨왕국은 1세기에 세워진 왕국이므로 솔로몬 제국이 기원전 10세기인 것을 감안하면 800년의 시차가 납니다. 이렇듯 이야기 속 역사는 어긋나는 현상과 현실이 적당히 어울리는 공간입니다. 악숨왕국은 시조에서 보듯이 시작부터 유대교 왕국입니다. 하지만 4세기 아르메니아에 이어 두 번째 기독교 왕국이 됩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아르메니안 군벌에서 시작해 로마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기독교를 공인한 아르메니아에 비해 순수한 면에서는 최초로 볼 수 있습니다.
이디오피아는 그 외에도 여러 면에서 기독교 종주국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신이 인간에게 약속한 증표인 언약궤를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언약궤는 기원전 13세기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신으로부터 약속받은 두 개의 돌판으로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에 멸망한 기원전 6세기 사라진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메넬리크 1세에 의해 이디오피아로 전해져 현재 악숨의 성 메리교회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이디오피아 사람들은 믿고 있고 그 외는 아무도 믿지 않은 진실 같은 거짓입니다. 악숨은 1세기부터 7세기까지 왕국의 수도였으며 특히 4세기에는 가장 흥성해서 당시 지구촌의 강국인 로마와 지중해를 두고 세력을 양분했을 만큼 강력했습니다. 이 때의 왕인 에자나왕은 유대교를 금지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택함으로써 앞에서 언급했듯이 세계 두 번째 기독교국가가 되었습니다.
에자나왕은 이집트 로제타 스톤에 버금가는 비문을 남겼는데 이 비문에는 전통 언어인 시바어, 이디오피아어인 게이즈어, 그리고 그리스로 쓰여져 있어 과거의 한 시대를 밝히는 데 큰 지침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보니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는 문명도 문자도 없다는 평가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합니다. 이디오피아가 있기때문입니다.
역사는 문자의 유무에 따라 역사와 선사시대로 구분합니다. 문자가 있어 기록으로 남은 사실만이 역사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흔히 문자가 없으면 문화가 없다는 극한 표현을 합니다. 문자가 없었지만 잉카나 마야는 높은 수준의 문명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올바른 평가는 아니지만 문자는 문명의 전달력과 상승력에 꼭 필요한 수단이어서 문자가 없는 문명은 순간 타오른 불꽃으로 보이기만 합니다.
아프리카에 유일하게 문자를 가진 나라인 이집트와 이디오피아는 문명의 창달이라는 많은 부분에서 퀘를 같이 합니다. 그래도 이디오피아가 더 자부심을 갖는다면 이집트는 문자를 잊어버렸지만 이디오피아는 오늘날까지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중해에서 파생된 문명의 근간인 고대 아시아 언어인 아람인은 기원전 10세기 북시리아에 거주했던 셈계민족으로 후에 힛타이트에게 멸망한 후 오리엔트 문화권 각지로 이주해 정착합니다. 그들은 상업에 특히 재주가 많아 그들의 언어는 오리엔트 지역의 무역과 상거래에 사용되는 주요 언어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앗시리아가 최초로 오리엔트를 통일한 후 오리엔트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던 아람인의 언어를 제국의 언어로 채용하였고 신 바빌로니아도 주요 언어로 채용하며 오리엔트 지역의 대표적인 언어가 되었습니다. 후에 오리엔트세계를 통일한 페르시아는 아리안이어서 아람어와 언어체계가 완전히 달랐지만 아람어의 영향력을 인정하여 서부 공영어로 인정했을 뿐 아니라 제국의 성업언어로 통용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람어는 변형되어 각 민족어에 흡수되었지만 오리엔트 지역 대부분의 언어는 아람어에 뿌리를 두어 발전합니다. 대표적으로 시리아 문자, 아라비아 문자 등 서방 아람문자 이외에도 사산조 페르시아의 파흐라비 문자, 쿠샨왕조의 카로슈티 문자, 인도의 산스크리트 문자, 인도문자에서 차용한 티베트 문자까지 아람어에 기반을 둔 문자입니다. 이를 동방 아람문자라고 한답니다.
동방 아람문자는 민족의 분지와 팽창으로 인해 중앙아시아에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는데, 중앙아시아의 소그드 문자, 위구르 문자, 만주 문자까지 구대륙 전체가 아람어 문자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의 문자는 그리스에서 시작했다고 봅니다. 이디오피아와 이집트는 어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기 보다는 독창적입니다. 그런 면에서도 이디오피아는 수준있는 문명과 역사를 가진 멋진 나라입니다.
악숨 다음 수도는 랄리베라입니다. 랄리베라는 이슬람과 연관하여 살펴봐야 합니다. 이디오피아의 역사는 1세기 악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7세기까지 이어진 악숨시대는 9세기 아랍 이슬람 세력이 침입하며 끝납니다. 이 때 기독교 세력은 이슬람을 피해 랄리베라로 도피해 기독교를 이어갑니다. 바로 랄리베라 시대입니다.
지하의 암석을 파서 만든 교회는 랄리베라의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비록 이슬람에 패하기는 했지만 이디오피아는 여호아의 약속인 언약궤를 보관한 민족입니다. 전 국민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기도 하구요. 잠시의 혼란을 수습한 자그웨 왕조는 11세기 이슬람을 쫓아내고 다시 기독교 왕조를 세웁니다. 하지만 이슬람의 저항도 만만치 않죠.
13세기에는 이슬람 왕조인 암하라 왕조에 자그웨 왕조가 망합니다. 이후 기독교 왕조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동하는 유목생활을 합니다. 그러다 17세기 곤다르에 수도를 정하며 기독교 왕조는 부활합니다. 즉 기독교 세력이 다시 이디오피아를 장악하고 이슬람을 쫓아냅니다. 지금 소수로 남은 이슬람 세력은 9세기 아랍이나 그 후 수단의 이슬람인 데르비시(수피)가 침입한 후 정착한 사람들입니다. 역사상 대립 관계였음에도 이디오피아에서는 종교적 갈등은 없답니다. 세상이 카톨릭과 이슬람으로 갈라져 수세기를 싸웠는데도 이디오피아는 소수로 전락하면 다수에 복종하고 다수는 소수를 보듬는 문화가 싹튼 모양입니다.
랄리베라의 마지막 왕조인 자그레브 왕조가 13세기 멸망한 후 이후 카톨릭 왕조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이곳 저곳을 떠도는 유목생활을 하였으므로 수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파실라다스 황제가 곤다르에 마지막 왕조시대의 멋진 수도를 건설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천사가 나타나 G자가 들어가는 곳에 왕도를 세워야 번창한다고 예언하여 곤다르로 정했다고 하는데 곤다르는 지형적으로도 수도에 알맞은 형세입니다.
거대한 분지로 주변을 산이 감싸 외부로부터 침략을 막아내기 쉽고, 거대한 분지라 물과 산물이 풍부하며 더불어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즉 이집트와 연결하는 수단이 200km, 아프리카 중부가 300km 정도 거리에 위치합니다.
곤다르를 대표하는 파실라다스 궁전 유적지를 탐방해보았습니다. 궁전을 건축하기 이전에 들어와 활동한 포르투칼 예수회의 영향을 받아 건물 외형은 바로크 양식입니다. 내부는 인도와 아랍양식이고 여기에 전통 악숨왕조의 양식이 더해졌다고 합니다. 한때는 너무 아름다워 아더왕이 지은 왕궁인 카멜롯에 비교해 아프리카의 카멜롯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궁과 도서관이 특히 멋진 건축미를 자랑하구요. 특히 대부분의 궁이나 사원이 외벽을 석회로 바르고 화려한 치장을 하는 데 반해 거의 치장이 없다는 게 도리어 시간의 느낌을 살려 아늑함을 줍니다. 돌과 회반죽으로 쌓아올려진 건물외벽은 멋 내지 않은 투박함이 그대로 나타나지만 전체적인 조화가 잘 이루어져 오전 산보로는 최고였습니다.
그렇게 이디오피아의 왕조역사는 끝이 납니다. 19세기 공화국으로 독립하며 수도를 아디스아바바로 옮기기까지 곤다르는 마지막 왕조의 수도였습니다. 우리나라 왕조의 마지막 수도는 한성이었습니다. 지금의 수도인 서울이지요. 격변기를 겪으며 한국이 성장했듯이 서울도 앞만 보고 성장해 남은게 마땅히 없습니다. 마지막 왕조의 수도가 충청도 어느 산골이었으면 우리에게도 보존할 많은 유적이 있었을텐데요. 우리가 편해진만큼 사라진 걸 아쉬움으로 남기는 수 밖에 없는 듯 합니다.
아프리카 여행기는 '아프리카, 낯선 행성으로의 여행'(채경석 지음, 계란후라이, 2014)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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