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디아민은 중앙아프리카의 보사카와 함께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폭군이었습니다. 무엇을 대표한다는 것이 늘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이지만 만 명을 죽이면 살인자가 아닌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요? 그저 정치적 결단? 심하게 덧붙이자면 폭군? 어떤 경우는 영웅이라고도 하지요. 뭐라고 하든 대부분의 폭군은 말년을 잘 살고 천수를 누립니다. 그게 정치적 판단이란 면피가 있어서 그런게 아닐까요? 여기 그런 사람이 탄자니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70년대 세상을 조롱한 우간다의 이디아민입니다.
그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갖은 악행을 일삼습니다. 얼마나 많이 죽였으면 그가 집권했던 8년동안 우간다강의 악어들은 강에 던져진 인간 시체를 먹느라 사냥하는 법을 잊어버렸을 뿐 아니라 너무 게을러져서 악어를 연구하던 학자들이 어이없어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디아민은 서나일강의 아루아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자기가 태어난 땅이니 탄자니아에 속한 아루아 지역까지 우간다 땅이어야 한다며 우겼답니다. 탄자니아의 초대 대통령인 니에레레가 이를 거부하자 탄자니아를 침공했다가 1년 만에 캄팔라가 함락되며 이디아민의 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그냥 잘 살면 될텐데 왜 무모한 짓을 했을까요? 그것도 군사강국인 탄자니아를 상대로. 아마도 그의 공포 통치도 한계에 다다랐을 테고 적지않은 군부의 저항이 있었을 것입니다. 군참모총장 출신으로 군심을 어떻게 돌려야 하는지 잘 알았겠지요. 그는 전용기를 파리로 보내 뒷골목의 창녀를 가득 싣고와 추종자들과 파티를 열곤했답니다. 그렇게 관리해도 잘못된 권력을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에겐 양심이란 게 있으니까요. 하여튼 그는 리비아를 거쳐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해 천수를 다 살았답니다.
사우디에서는 그와 얽힌 재미난 일화가 있는데요. 율법학자들이 망명을 요청한 이디아민을 상대로 심문을 했습니다. 그가 반대파를 죽여 인육을 냉장고에 넣어 가끔 꺼내 요리해 먹으며 맛을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이디아민은 율법학자들 앞에서 냉장고에 보관은 했지만 먹지는 않았다고 항변했다는군요. 율법학자들은 파이잘 국왕에게 이디아민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냈지만 파이잘 국왕은 결국에는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요지경 속입니다.
이디아민을 쫓아낸 탄자니아의 쥴리어스 니에레레 대통령은 여러 면에서 아프리카의 정체성을 세운 대통령입니다. 사회주의 정책을 추종한 그는 후에 그의 경제정책이 경제성장을 견인하지 못하자 실패를 인정하고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아프리카의 유일한 멋쟁이이기도 합니다. 탐욕스런 부족주의가 팽배한 아프리카에서 스스로 권력을 놓는다는 건 부족의 앞날을 고려해도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어서 반대가 아주 심했답니다.
하지만 용기있는 결단을 보여준 존경받을 만한 분입니다. 그는 초대 대통령으로서 국가의 공식 언어를 무엇으로 할지 결정한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은 공용어로 영어나 프랑스어, 독일어를 공식화한 가운데 탄자니아는 토속 언어인 스와힐리어만을 자국어로 인정해 아프리카의 정체성을 구현합니다. 물론 북아프리카는 온통 아랍어니까 북아프리카는 예외입니다.
스와힐리족은 동아프리카의 주류 민족인 반투족 여자와 아랍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족으로 그들의 언어를 스와힐리어라고 합니다. 즉 아프리카와 이슬람의 만남이자 혼합이지요. 이런 선택에 따라 잔지바르를 합병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합니다. 만약 하나의 부족 언어를 택하려 했다면 상대 부족의 저항이 심했을 테니 전쟁을 하지 않고는 특정 부족어를 공용어로 택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니에레레 대통령은 또한 GNP(국민총생산, Gross National Product)의 16%를 교육에 쏟아부어 문맹을 퇴치하고 국민교육에 힘써 탄자니아 발전의 초석을 다진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보다 더 훌륭한 건 이디아민을 쫓아내 우간다를 불행에서 건져낸 것이구요.
탄자니아를 좀 더 알아보려고 탄자니아의 수도 다르에살람의 박물관에 찾아가 보았습니다. 이번 여행의 지침으로 삼은 김성호 작가님이 지은 ‘안녕 Africa’에는 15세기 명나라 환관 정화가 동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조공무역을 했던 사진과 공룡보다 훨씬 전인 3억 5천만년 전부터 진화하지 않은 채 현재까지 존재하는 실러캔스라는 살아있는 화석이 전시되어 있다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6개의 갤러리를 샅샅이 뒤져보았습니다.
특히 실러캔스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척추동물로 지느러미에 뼈가 있고 수심 600m에서 지느러미로 다리처럼 걸어 다니며 아가미와 허파로 같이 호흡할 수 있는 즉, 어류와 양서류의 중간단계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1938년 발견할 당시에는 어부들에 의해 뼈와 내장 정도만이 남을 정도로 사체가 훼손되었었지만, 그 후로 일년에 한 두마리가 인도양에서 잡혀 현재 100여 마리가 연구와 전시용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실러캔스를 찾아 생물학관에 갔습니다. 실러겐스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돌고래가 있었습니다. 워낙 귀한 몸이다 보니 어디로 출장갔나봅니다. 출장여부도 확인 안하고 온 우리가 잘못한 거죠. 돌고래도 바다에 사는 포유류로서 특이한 동물이라는 설명이 장황하기는 합니다. 어디갔냐고 물으니 관리인이 없다는 말 이외 더이상 설명하지 못합니다.
생물관을 나와 제 1관에 가니 책에서 설명한 명나라 황제에게 조공으로 바쳤다는 기린 그림 대신 대항해시대 이전, 인도양 무역로를 그린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지도는 유럽이 인도양에 나타나기 훨씬 전에 중국-인도-아라비아-동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무역이 활발했음을 보여줍니다. 바스코 다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들어오기 500년 전인 10세기경에도 인도양 각 지역은 촘촘히 무역로가 연결되어 있었고 심지어 중국 정화 대함선이 동아프리카에 닿은 것도 유럽보다 80년이나 앞섭니다.
지도에 표기된 인도양 무역의 한 끝은 중국이고 다른 한 끝은 잔지바르, 몸바사입니다. 중국을 연결하려면 말레카 해협을 통과해야 하는 데 그 항로가 해적도 많고 쉽지 않아 인도양 무역에 중국이 참여한 건 한참 후인 15세기경입니다. 그 시작을 정화의 조공무역에서 찾기도 합니다. 15세기 당시 명나라는 당시 세계 최고의 함대를 보유한 강국이었음에도 해양으로 뻗어나가지 않고 쇄국정책으로 돌아갑니다. 1세기 후 유럽이 바다로 피터지게 진출한 것에 비교해 볼 때 참으로 아쉽기만 합니다.
역사의 인물 정화를 살펴볼까요? 그는 운남에서 태어난 아라비아인이어서 가문 대대로 바다 건너 세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정화의 후원자는 영락제입니다. 영락제는 주원장의 넷째 아들이어서 왕위에 오르는 데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첫째, 둘째, 셋째를 제껴야 했으니까요. 아마 왕이 되서도 명분을 중시하는 사대부나 관료세력의 견제를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해외팽창을 추진한 정화를 중심으로 한 환관 세력은 명분도 부족하고 비용대비 효과가 떨어지는 조공무역을 반대하는 관료세력에 밀려 점차 세력을 잃습니다.
관료세력은 국내문제와 북방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며 다시는 해외 조공무역을 하지 못하게 거대 정크선을 해체해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까지 했습니다. 중국의 후퇴는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청나라를 거쳐 반식민 시대에 들어갑니다. 만약 정화의 해외팽창정책이 지속되었다면 중국이 변했을까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역사엔 가정이 없으니까요. 그럴지라도 정화 덕에 중국인은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인도양 곳곳에 자리를 잡아 화교사회를 만드니 화교의 시작도 정화로부터 시작입니다.
영락제 하니 떠오르는 라이벌이 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패자 티무르입니다. 그는 70세의 노구에 20만을 이끌고 2월의 추운 한파를 뚫고 시르다리 강을 건너 중국 정벌에 나섰다가 그만 병영에서 병사합니다. 만약 그가 병사하지 않았다면 멋진 한 판이었을 것입니다. 젊은 영락제의 패기도 만만치 않지요. 거기에 건국 초라 국력이나 병력도 단단합니다.
상대자 티무르는 설명이 필요없는 싸움꾼이지요. 심지어 앙카라 평원에서 한참 잘나가던 오스만 투르크의 20만 대군을 단숨에 굴복시킨 싸움의 달인입니다. 한 번도 져 본적이 없는 명장 중의 명장입니다. 어쩌면 티무르의 위협이 정화의 꿈을 접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북쪽을 막기에도 부족한데 재원을 나누어 조공무역과 시장 개척이라니.. 공무원들에게는 너무 안일하게만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서로 물고 물리는 게죠.
역사 갤러리와 현대 미술 갤러리를 쭉 돌아오고 나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박물관에서 보려고 하는 걸 하나도 보지 못한 꼴이 되었습니다. 책은 그저 책인가 봅니다. 누군가의 경험을 안내하는 책이 내 경험의 밑바탕이 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박물관을 나와 숙소인 쿤두치 비치호텔로 달려갑니다. 그 곳에서 밀린 여행기를 쓰며 이틀을 보낼 것입니다. 다르에살람을 아랍어로 ‘평화로운 안식처’라고 합니다. 이제 탄자니아를 떠나기 전 평화로운 안식을 가질 시간이 된 듯 합니다.
아프리카 여행기는 '아프리카, 낯선 행성으로의 여행'(채경석 지음, 계란후라이, 2014)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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