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보냈을 뿐인데 멕시코시티의 붉어가는 향기가 점점 짙어짐을 느낍니다. 멕시코시티의 향기는 왜 모진 피비린내를 동반할까요, 같은 뿌리를 두었건만 반도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살아가는 우리네와 달리 멕시코는 투쟁과 혁명의 아이콘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건 아마도 이곳이 라틴 아메리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북에서 남으로 가든, 남에서 북으로 가든 하나의 세력이 이동할 때는 이곳을 거쳐 가야만 했고, 남과 북이 충돌하며 이질적인 세력들이 만나 새로이 질서가 만들어졌습니다.
멕시코시티가 메소 아메리카의 중심이 되기 전, 세상의 중심은 테오티우아칸이었습니다. 테오티우아칸은 최초의 도시문명이며, 제대로 된 아니 상상을 초월하는 문명의 집결지이기도 합니다. 기원전 200년경에 시작되어 서기 800년까지 1,000년 동안 지속되었으나 북에서 내려온 무당 케틀코아틀이 이끄는 부족에 의해 멸망합니다. 그리고 상대를 공포로 지배하는 인신공양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와 뿌리를 같이 하는 맥 족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우리는 수치심을 느껴야 할 듯합니다.
도시국가 테오티우아칸의 시민들은 놀라움과 미스터리한 문명을 창달한 문화인들이었습니다. 테오티우아칸의 면적은 20평방 km로 동시대 세계 어디에도 없는 거대 도시입니다. 고대왕국의 강자 중국에는 이 시기에 통일왕조인 한나라, 당나라가 존속했으며, 특히 테오티우아칸이 멸망할 즘엔 고구려의 후예 고선지 장군이 멀리 우즈베키스탄까지 당의 영역에 복속시킬 만큼 최고 전성기를 누립니다.
당의 최고 전성기 때 장안성의 크기는 동서 9.7km, 남북 8.6km로 약 12평방 km정도이니, 테오티우아칸에 비해 작지 않은 규모입니다. 하지만 장안성의 거대함을 표현할 때 동시대 서구 세계의 중심인 비잔틴성의 6배, 7배라는 수치로 간단히 설명합니다. 그러니 테오티우아칸이 미스터리라고 불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테오티우아칸의 가치는 멸망 후에도 도시가 버려지지 않고 활용되는데 있습니다. 제국의 멸망과 함께 중심부가 폐허로 변하는 역사의 흐름에서도 비껴서 있었습니다. 건축물은 위대했고 침략자를 흡수할 만큼 수준 높은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고전기 마야와 교류하며 그들의 우주관을 받아들인 테오티우아칸은 제5 태양계가 시작한 성소로 받아들여집니다.
곽재성, 우석균 저 "라틴 아메리카를 찾아서"에 따르면 제4 태양계가 끝나고 태양과 달이 사라져 세상은 어둠의 지배를 받습니다. 헌데 유일하게 테오티우아칸에만 일말의 빛이 존재했기 때문에 신들은 이곳에 모여서 태양이 사라지고 어둠에 지배되는 세상을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신들은 고민 끝에 두 명의 신을 선발하여 빛을 살리기로 했고, 나나우아씬과 떼꾸씨아까뜰이 불속에 뛰어들어 몸을 태웁니다. 그리고 한 명의 신은 태양으로 다른 한 명의 신은 달로 재탄생합니다. 그 후, 태양과 달은 환생했지만 둘이 동시에 하늘로 떠올라 움직이지 않자 신들은 기운을 모아 입김을 불어넣었고, 태양과 달은 다시 세상에 빛과 어둠을 내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테오티우아칸에 전해져 내려옵니다.
다시 말하면 테오티우아칸은 제5 태양계의 시작이니 제5 태양계에 살고 있는 메소 아메리카인에게 테오티우아칸은 세상의 중심이자 최고의 성소입니다. 메소 아메리카의 주인은 테오티우아칸 다음 똘떼까, 그 뒤를 이어 최후의 제국인 아즈텍이 헤게머니를 잇습니다. 두 문명의 공통점은 모두 북아메리카에서 이주해온 유목민이었고, 호전적이며 도시 공동체 사회를 유지합니다.
즉, 강력한 중앙집권제라기보다 연합정권이었습니다. 그들이 인신공양을 선택한 정치적 이유가 항상 서로를 견제해야 하는 긴장감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테오티우아칸이 이룩한 높은 신정체제에 닿을 수 없었던 똘떼까와 아즈텍은 그 부족한 틈을 공포로 채우려 한 게 아닐까요?
말린체는 유카탄 반도의 작은 부족의 공주였다가 어머니에 의해 노예로 팔린 후 코르데가에게 선물로 주어지고, 그의 아이를 낳아 최초의 메스티조를 낳은 어머니라 불리는 여인입니다. 멕시코에서 그녀는 배신자라 불리지만 그녀가 아즈텍 멸망에 온 몸을 받혀 기여한 이유를 저는 인간성 회복과 잔악문명의 멸절을 희망하는 한 인간의 간절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즈텍이 멸망한 것이 애석하고 슬픈 일인지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건 아즈텍의 귀족이나 왕족의 입장이 아닐까요? 예측할 수 없는 침공을 당해 인신공양을 바쳐야 하는 가족이 있고, 감당하기 어려운 공납을 강요받아 생활고에 허덕이는 복속된 부족들에게도 아즈텍의 멸망이 애석하고 아쉬운 일이었을까요? 단지 스페인에 의해 이루어진 현상이라 아쉬울 뿐인 것이죠.
기록에 따르면 아즈텍은 일 년에 2만 명을 인신공양으로 바쳤다고 합니다. 흑요석으로 만든 돌칼로 산 사람의 가슴을 갈라 펄떡이는 심장을 착몰이라는 돌선받에 올려 태양신께 헌정하는 일상이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됐습니다. 심지어 1487년 태양의 피라미드 재봉헌 때에는 4일간 8만 2백 명을 재물로 바쳤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제물이 될 사람들이 도심 밖까지 길게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전해져옵니다.
사제도 대단히 피곤한 업무입니다. 가슴뼈를 갈라야 심장을 온전히 꺼내는데, 도끼가 아닌 칼로 갈빗대를 뜯어내는 작업은 보통 힘겨운 노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때로는 비논리적 현상을 낳습니다. 그럼에도 무리 없이 마무리되는 것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믿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질서가 그러하듯 누적된 피로는 결국 대안에 눈 뜨게 합니다. 모두가 죽음의 대상이 될 때, 공포는 저항을 가져왔고 아즈텍은 가장 전성기에 쇠퇴를 맞습니다.
코르데가가 아즈텍의 수도 테노쉬띠틀란에 입성했던 1519년은 목테수마 2세가 아즈텍의 영역을 최대로 확대한 정벌 전쟁이 끝난지 2년 밖에 지나지 않아 제국이 가장 번창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만의 인구가 600명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한 이유가 공포 이외 달리 있을까요.
테오티우아칸의 달의 피라미드에 오르니 도시 구조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달의 피라미드를 중심으로 전면에 뻗은 대로를 죽은 자의 길이라고 부르는데, 폭이 42m, 길이가 8km에 달합니다. 길이는 이해가 가지만 폭이 42m라면 왕복 30차선에 해당되니 대단한 규모입니다. 이 도로를 중심에 두고 좌우로 거대한 건축물이 빼곡했을 과거를 회상해 보면 죽음이 그리 두려워 보이지 않습니다.
인신공양을 하러 신전에 다가가는 제물은 성스러운 분위기와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에 압도되어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스스로 피라미드 계단을 걸어 올라갔을 겁니다. 그리고 가슴을 열어젖히며 소리쳤겠죠. "신은 위대하다."
멕시코시티로 돌아와 소갈로 광장에서 머뭇거립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광장은 천안문 광장이라지만 소갈로 광장도 크기가 이에 뒤지지 않습니다. 마지막 황제인 목테수마가 2세의 궁을 헐고 그 자재로 지었다는 대통령궁, 남미 최대의 성당이라는 메트로 폴리타나 대성당, 성당 자리에 있었던 아즈텍의 중심사원 템플 마요르 등을 돌아보며 광장을 일주합니다.
광장의 건물들을 추측하면 광장은 아즈텍 시대에 만들어진 규모 그대로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대단히 크고 웅장하며, 정교한 도시였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1519년 테노쉬티틀란에 입성한 코르데사는 너무 감격해서 자신이 본 것을 다음과 같이 황제에게 보고합니다.
"저는 말씀 드릴 수 있는 전체 분량의 100분의 1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눈으로 직접 그것을 목격한 저희도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만일 저의 설명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저의 설명이 너무 길어서가 아니라 너무 짧아서일 것입니다"
당시대 유럽의 최대 도시인 세비아는 인구가 3만이었으나, 테노쉬티틀란은 30만 명이 거주하는 거대 도시였으니 코르데가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이 갑니다. 하지만 코르데가는 아즈텍을 정복했고 파괴했으며 지워버렸습니다. 두 문명의 만남은 비극으로 끝났고 아즈텍의 과거는 흔적도 없이 지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가톨릭의 역사가 쓰였습니다.
아즈텍은 멸망해야 마땅한 문명이었지만 그렇다고 스페인이 구원자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아즈텍이 멸망하고 한 세기가 지났을 때 2천만이었던 아즈텍의 인구는 100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잔악한 문명을 피하려다 더 잔악한 문명을 만난 꼴입니다. 역사를 보면 유럽과 아메리카는 결국 만날 운명이었습니다. 단지 그 과정이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잔인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을 뿐입니다.
3일간의 멕시코시티 여행이라지만 마드레스 산맥 트레킹으로 하루를 빼놓아야 하므로 둘째 날은 바쁜 하루를 보냅니다. 테오티우아칸에 이어 소갈로 광장을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남은 차풀텍 성을 찾았습니다. 메뚜기 언덕이라는 뜻의 차풀텍 성은 근대사의 비애를 품은 비운의 성입니다. 막시밀리언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 프란츠 요세프 황제의 동생으로 개인적인 능력은 출중했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의 적자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멕시코의 마지막 황제가 되고 멕시코의 공하정파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묵었던 왕궁이 차풀텍 성입니다. 그는 왜 이역만리 멕시코에서 생을 마감했을까요? 그리고 멕시코는 1824년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공화국이 되었는데 40년이 지난 1864년에 막시밀리언 1세가 황제로 등극한 배경은 무엇일까요?
멕시코는 독립을 하고서도 미국과 전쟁을 해야 했고 그로 인해 프랑스로부터 많은 부채를 안게 됩니다. 전쟁 후유증을 심하게 겪은 멕시코는 결국 부채 상환 불능을 선언하고 채권자인 프랑스가 멕시코를 침공해 지배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프랑스 왕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의 왕정 복귀를 시도하고 그 자리를 막시밀리언 1세에게 제안합니다.
야망의 사나이 막시밀리언 1세는 그렇게 멕시코의 왕이 되었지만 처음 약속과 달리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임박하자 멕시코에서 철수했고, 공화정파의 역공으로 막시밀리언 1세는 위기에 몰립니다. 나폴레옹 3세는 막시밀리언 1세에게 왕위를 포기하고 유럽으로 돌아오라고 제안하지만 그는 끝까지 왕이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공화정파에 포로가 되어 형장의 이슬이 됩니다. 합스부르크 왕가를 이을 수 없는 비운의 둘째, 그는 멕시코에서 왕이 되었지만 영광은 짧았고, 영광의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유럽의 최고 명가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후 급속히 몰락하는데, 프란츠 요세프 황제의 부인과 아들은 비운의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합스부르크 왕가는 조카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잇게 됩니다. 막시밀리언 1세가 멕시코에서 사형을 당하지 않았다면 차기 왕위는 그의 몫이었습니다. 능력과 야망을 지녔건만 세상을 멀리 보지 못한 그는 멕시코 왕이라는 명예를 위해 목숨을 바치니 차풀텍 성을 돌아 나오는 내내 가슴이 저밉니다. 조금만 참지, 그랬으면 평생의 소원인 합스부르크 왕가를 계승했을텐데,,,
막시밀리언 1세의 죽음, 차기 왕위 계승자인 조카의 죽음, 그리고 형인 프란츠 요세프 왕의 죽음으로 비운 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직계 승계는 끝이 납니다. 그리고 프란츠 요세프 왕의 뒤를 이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왕마저 사라예보에서 총에 맞아 숨을 거둠으로써 1차 대전이 일어나고 합스부르크 왕가는 결국 문을 닫고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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