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에서 4개의 여행을 선택하리라 마음먹고 집을 나섰습니다. 하나는 멕시코와 우리나라가 같은 뿌리인지의 여부를 알고 싶어 그 첫 답을 찾으러 인류학 박물관을 찾았고, 다음으로는 멕시코가 가진 슬픈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테오티우아칸, 차풀텍 성, 소갈로 광장을 찾았습니다.
세번째로 찾아보고 싶었던 건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왜 마드레스 산맥에 웅지를 틀었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을 찾는 일입니다. 남쪽으로 내려갈 수 있고, 고원이 아닌 저지대에 자신들만의 세상을 꿈꿀 수도 있었을 텐데.. 임꺽정 같은 비적도 아니건만 당시로 보면 접근이 제한적인 산골짜기인 고도 2,000m 중앙고원에 문명을 꽃 피운 이유가 궁금합니다.
마지막 네번째는 지구의 역사를 바꾼 행성의 충돌 사건과 사라진 마야의 실종 사건을 파헤치는 것인데, 이는 여행 말미 유카탄 반도와 과테말라에서 해야할 일이니 나중으로 미루어 둡니다. 그런데 멕시코에서 찾아봐야 할 하나가 더 생겼습니다. 제 3세계의 저항 에너지로 자리잡은 멕시코의 저항정신입니다.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보다 7년이나 앞서 최초의 사회주의 민중혁명을 이룩한 멕시코의 저항정신은 무엇을 낳았을까요? 10일간의 멕시코 여행에서 나흘째 여정이 시작됩니다. 남은 6일간은 어떤 답을 얻을까요, 천천히 마드레스 산맥을 향해 발검음을 옮깁니다.
기록에 의하면 670년 2차 대규모로 이주한 민족은 다섯 부족으로 나뉘어 살았습니다. 그 중 한 부족이 남하를 계속해 잉카의 안데스 문명을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게 보면 부여에서 시작된 무리의 공간 이동이 라틴 아메리카의 문명을 낳은 것입니다. 아메리카의 남과 북은 중생대 테티스해를 사이에 두고 남쪽의 곤드와나 대륙과 북쪽의 로라시아 대륙으로 떨어져 있었는데, 점차 이동하여 하나의 대륙으로 이어집니다. 이 때 탄생한 산줄기가 마드레스 산맥입니다.
티벳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대륙의 경계에서는 큰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고, 물론 지판이 약한쪽이 들어올려져 고원을 이룹니다. 멕시코가 넓은 고원으로 이루어진 걸 보면 멕시코 또한 로라시아 대륙의 해안선이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인지 북쪽으로 2시간 30분 가량 비행기로 이동해 시작한 마드레스 산맥 횡단은 기차와 차량으로 이틀간 5시간 달리는 동안 2,200 ~ 2,600m 사이를 오가는 넓고 메마른 고원이 풍경의 전부입니다.
산맥이라지만 봉우리 하나 갖지 않은 고원구릉이 전부인 멋없는 산맥인 셈입니다. 그럼 마드레스의 심장부는 어떨까요. 마드레스 산맥은 최고봉 오리사바(5,636m)를 비롯해, 제 2위봉 포포카테페틀(5,426m), 제 3위봉 이시타시와틀(5,230m) 등 3개의 5,000m 봉우리를 품고 있고 3개의 봉우리는 모두 멕시코 중앙 고원의 심장부에 해당되며 멕시코시티 외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즈텍은 3개의 봉우리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원에 호수가 되고, 호수 한 가운데 틀고 앉은 섬에 제국의 수도인 테노쉬티틀란을 세웠습니다.
멕시코시티에서 가능한 마드레스 트레킹은 제 3위봉인 아시트와틀을 등반 대상으로 합니다. 하루 산행으로는 뷰 포인트를 목적지로 하고, 정상을 목표로 하려면 정상 화구능선에서 하루를 아영하는 이틀간의 등산이 적합합니다. 멕시코시티의 마지막 날은 마드레스 산맥의 제 3위봉 이시타시와틀 트레킹으로 하루를 보냅니다.
교통 지옥을 피해 새벽 5시에 일어나 마드레스로 향합니다. 아침은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걸죽한 돼지 뼈 스프와 옥수수 빵을 단단히 먹고 차량으로 3,900m 까지 올라갑니다. 이시타시와틀 화산은 정상으로 갈수록 경사가 급하고 메말라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건 물론 랜드 슬라이딩(land sliding)이 심해 걷는데 불편합니다.
반면 산 아래는 울창한 산림이 빼곡히 들어서 도심의 산소 공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산을 오르니 아즈텍의 선택이 아주 현명해 보입니다. 화산은 산세가 단순해서 어느 정도만 올라도 넓은 고원에 펼쳐진 멕시코시티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4,200m 에서 첫 조망권이 형성되고 다시 오르는 4,500m 에서 두 번째 조망이 들어옵니다. 여기서부터 정상 분화구가 멀고도 가파릅니다. 바삐 걸음을 재촉하면 하루에 갔다올 수 있다지만 저는 여기서 오늘의 산행을 멈춥니다. 이것만으로도 멕시코 중앙고원을 이해하는데 좋은 길잡이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모처럼 도심의 빡빡함에서 나와 대자연을 걸으니 여행은 단색이면 안 된다는 어느 고수의 말이 떠오릅니다. 역사는 붉은 색, 문화는 파란색, 여행자의 삶은 노란색, 자연은 푸른색, 하나로 섞으면 역시나 검은색이겠죠 모든 걸 무마시키며 조용히 자기 자기로 돌아가게 합니다.
미국의 국경까지 비행기로 날아간 이유는 마드레스 끝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코퍼밸리(copper valley)의 명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성탄절을 즐기는 멋진 풍경, 그랜드 캐년의 2배에 해당되는 광활한 대자연, 원시 인디오의 삶을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오지, 설명이 멋져 코퍼밸리로 찾아갔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보통 일주일에서 10일정도 코퍼밸리를 즐긴다는데, 4일로 많이 부족하면 어떡하나 우려하면서 떠난 코퍼밸리의 여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비행기를 2시간 반이나 타고 다시 차량을 대절해 3시간을 달려 하룻밤을 보낸 뒤 다시 pacific railway라는 기차를 6시간 타고 찾아간 수고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세상의 멋지다는 풍경만 콕 집어 눈요기 거리로 찾아가는 여행을 20년째 해오다 보니 세상의 멋진 풍경은 거의 다 본 듯 합니다.
그래서인지 웬만한 풍경으로는 감동하지 못하는 저의 문제일까요? 그런데 동행한 분들도 그저 그런 풍경에 시큰둥 합니다. 사기를 당한 기분입니다. 그래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게 여행자의 여유고 그런 가운데 흥미를 찾아내는게 여행자의 덕목이라 애써 웃음지으며 계곡 안으로 들어갈 다음날을 기대해 봅니다.
코퍼밸리의 둘째 날, 케이블카를 타고 계곡 안 봉우리까지 이동합니다. 여기서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오는 트레킹을 시작합니다. 110여분 케이블카를 타고 가는 동안 광활하게 펼쳐진 계곡을 맞이합니다. 그랜드 캐년과 같이 웅장하고 다양한 색조를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케이블카를 타고 계곡의 심장부로 들어오니 가슴이 후련합니다.
계곡 아래 작은 마을엔 허름한 박물관이 있는데, 철도가 마을을 바꾸어 놓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사진과 몇 가지 기구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115세 최고령 할머니의 모습이 담긴 사진, 마을 축제, 기차가 개통되는 현장, 그리고 달리는 청년 차스키(잉카시대 잉카의 길을 달리는 전령사)인가 물으니 사냥꾼이라고 합니다. 안내자의 말에 따르면 옛 사냥꾼들은 무기를 쓰지 않고 뛰어가서 사슴의 뿔을 잡는 방식으로 사냥을 했다는데 산길을 사슴보다 더 빨리 달린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가볍게 계곡을 걷고 돌아오는데 우리의 아쉬움을 눈치챘는지 안내하던 캄포스는 절벽에 걸린 동굴을 가리키며 가보겠냐고 합니다. 그들은 동굴에서 무엇을 먹고 사냐고 물으니 박쥐를 잡아 먹고 산다고 합니다. 박쥐라면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에볼라 바이러스가 생각납니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박쥐 스프를 즐겨먹던 아프리카 중부지역 원주민에게서 처음 발생했습니다. 캄포스에게 에볼라 바이러스가 박쥐에서 나왔다고 설명해주니 멕시코 박쥐에는 그런 바이러스가 없다고 응수합니다.
그렇게 그의 안내로 동굴 거주민을 찾아갔습니다. 동굴 끝에 차양을 세워 비가 들이치지 않게 하고, 안으로는 간단한 주거 공간을 만든 집입니다. 현대화된 동굴 주민은 옛 방식대로 살고 있지 않은지 동굴 한편엔 인스턴트 스프도 있고 빵도 있습니다. 그들의 주거를 보면 얼마 떨어지지 않은 미국 인디안의 이야기가 남다르지 않습니다. 미국 남서부의 챠코 캐년엔 나바호 인디언의 발전된 문명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미국 인디언 중 가장 앞선 문명으로 인정받는 '아나사지 문명'을 이룩합니다.
그런데 1,300년경 그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문명터를 포기하고 어디론가 떠납니다. 그리고는 다시 원시 상태로 돌아갑니다. 무슨 이유에서 일까요? 이룩한 터를 버리고 떠난다, 이유는 몇 년간 비가 오지 않은 것입니다. 엘리뇨는 바람 방향이 서에서 동으로 불어옵니다. 엘리뇨의 시기와 태평양 연안에 사람이 정착한 시기가 비슷하게 맞물린다는 건 태평양에서 습윤한 바람이 불어오며 비를 가져와 인간의 정착과 문명 창달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즉, 문명 발전 단계에서 보여지는 잉여 생산물의 효과입니다. 그런데 남방진동 현상으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비가 오지 않는 지구적 현상이 1,300년에 들어서며 아메리카 대륙에 일어납니다. 비에 의지해 문명을 일구고 살았던 나바호 인디언은 무려 2년간이나 비가 오지 않자, 건조한 챠코 캐년을 떠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아나사지로 불리는 챠코 캐년의 유적지는 절벽에 굴을 파고 돌을 쌓아 건축물을 만든 동굴 주거의 형태입니다. 여기 동굴에 주민이 그들의 후손은 아닐까요,
바람이 운명을 바꾼 사건은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외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납니다. 엘리뇨가 끝나고 난 뒤, 시작된 라니냐는 남아메리카를 덮칩니다. 바다 수온이 2도 정도 낮아지면서 증발량이 현저히 줄고 이런 건조한 대기가 열대 우림에 꽃피운 마야를 덮칩니다. 앙코르 왓트를 버리고 떠난 사람들, 모헨조 하랍파가 아리안인의 침공 때 아무런 저항도 못할 만큼 폐허가 되어있었던 상황, 그 모든 역사적 사건의 배후에 비가 있었고 그 비를 조정한 주범이 어쩌면 바람인지 모릅니다. 바람과 문명 이야기를 다룬 내셔날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문구가 떠오릅니다. "바람은 인류의 문명을 좌우한다."
그나마 절벽 주거인을 만난 것으로 아쉬운 코퍼밸리 여행을 마무리합니다. 누군가가 적어 놓은 목록을 보니 세계 10대 계곡에 코퍼밸리가 들어갑니다. 10대 계곡은 미국 그랜드 캐년, 호주 케이퍼티 캐년, 페루 코아후아시 캐년, 멕시코 코퍼 캐년, 나미비아 피시리버 캐년, 티벳의 얄룽창포 캐년, 페루 꼴까 캐년, 남아공 블라이드리버 캐년, 멘테 네그로 타라리버 캐년, 네팔 칼리 칸달리 계곡(무스탕) 등 입니다. 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나미비아의 퍼시피 캐년 보다는 중국 호도협이 더 깊고 거대하며, 남아공 블라이드리버 캐년은 중국 태항 대협곡에 한참 못 미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순위 메기기에 익숙한 문화는 순위로 가치를 정하려 하지만 10대 계곡을 꼽은 사람도 세상을 다 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아직 봐야 할 세상이 많으니 아직은 코퍼밸리에 대한 판단을 미뤄두고자 합니다. 10년쯤 뒤에는 코퍼밸리가 멋지게 다가올 수도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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