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구아는 찾아갈만한 도시이고, 느낄만한 도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지난 시간들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안티구아는 1776년 도시 전체가 지진으로 폐허가 되기 전까지 식민지 중앙아메리카 즉, 멕시코를 지나 남미가 시작되는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전까지 지금의 국명으로 보면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니카라구아,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산살바도르를 하나로 묶은 지역의 수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지진과 화산 폭발로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지금의 과테말라 시티에는 새로운 수도가 들어섭니다. 로마의 베수비오스 화산은 폼페이를 완전히 파괴했고, 폼페이는 도시로써 다시 살아나진 못했습니다. 과테말라의 푸에고(불을 의미) 화산이 터졌을 때 안티구아의 70% 정도만 파괴되었고, 나머지 30%가 살아남아 부분적으로 도시 기능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는 후에 아주 중요한 선물이 됩니다.
안티구아는 지난 150년간 인류가 겪은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시화가 정점을 지나며 인류의 머릿 속에 공허가 찾아올 때, 18세기의 모습 그대로 유지된 안티구아는 고향같은 향수를 불어일으킵니다. 그래서 1979년 아메리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식민도시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됩니다.
버려진 도시였으나, 버려졌기 때문에 사랑받는 시대의 도시로 다시 태어나는 동화가 우리에게도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한국의 급격한 발전과 변화는 과거의 부정으로부터 시작된 면이 다분히 많고, 시간의 흐름을 묶어둔 화산도 없어서 뒤늦게 북치고 장구치며 인위적으로 만들어 냈지만 얄팍함으로 겨우 겉치레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티구아는 무엇을 보존했고 무엇이 남아있어 방문할만 도시이고, 느낌이 살아있는 도시가 되었을까요, 안티구아는 폐허가 되기 전 환상적인 종교 도시였습니다. 중앙아시아의 영험의 도시로 부하라를 꼽습니다. 이유는 많은 모스크가 존재하며 그로인해 도시 전체에 종교적 깊이와 영적인 분위기가 배어있기 때문입니다.
안티구아는 행정 중심지가 되기 전에 프란시스코파, 도미니카파, 메르세드파, 카푸치나파, 제수이트파, 카르멘파 등 남미에 신의 역사를 펼쳤던 여러 카톨릭 교파들이 모여 있었으며, 이들이 지은 수도원이 38개, 성소가 15개에 달하는 거대 종교 집합지였습니다. 한마디로 남미 최고의 카톨릭 성소이자 카톨릭 정신의 중심지였습니다. 어쩌면 그런 신성 때문에 폼페이와 다른 운명으로 선택되었는지 모릅니다. 안티구아 여행은 수도원과 성당을 돌아보는 일로 시작하여 끝이 납니다.
돌아보는 시간도 개인에 따라 반나절에서 많게는 며칠이 소요됩니다. 간략 동선을 정리해보면 십자가 언덕에 올라 아구아 화산과 도시 전체 조망하기, 메르세데스 성당과 그 안에 숨겨진 분수대 찾아보기, 분수대를 보려면 별도의 입장료를 내야 하지만 안티구아의 건축 명물로 손꼽히기 때문에 입장료 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노란색 아치가 세워진 중심대로 걸어보기, 아치 위로 걸린 아구아 화산은 안티구아의 상징인 사진이기도 합니다. 광장의 대성당 찾아가기, 지진의 여파로 뒷면은 무너졌지만, 전면은 무사히 남아 18세기의 전통 건축 양식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 성당엔 마야의 정복자 알바라도 부부가 묻혀있다고도 하고, 독재자 까스띨요가 묻혀 있다고도 합니다.
까스띨요는 민의가 아닌 힘에 의지해 독점적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정복시대야 아주 당연한 현상이고 독립한 후에도 혼란스럽던 초기에 당연시 되던 권력 구조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대륙은 이미 다 변화했건만 남미의 까스띨요 지배는 변함없이 견고하기만 해 이를 극복하려는 좌파 혁명이 반복되었습니다. 하지만 냉전 시대의 중심에 있던 70년대 남미는 독재와 민주의 싸움이 아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싸움으로 호도되면서 혁명과 쿠테타가 반복되는 슬픈 땅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고 가슴에 응어리가 깊게 남았으니 그게 불행인거죠.
그런데 안티구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봅니다. 까스띨요는 모두 부패하고 탐욕스러우며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사회 변화에 저항하는 인물만 있을까요.. 특히나 과테말라는 중남미를 통틀어 가장 토지의 왜곡이 심하기로 이름난 나라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93년도 과테말라의 외화 수입 중 60%가 농작물인데, 인구 중상위 2%가 72%의 경작지와 농업 생산의 92%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소수의 대농장주와 이를 기반으로 부와 권력을 독점한 가스띨요 이외 모든 국민은 소작농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치입니다.
대부분 남의 땅에서 소처럼 일하고 하루 세끼 겨우 얻어먹는 그런 삶이 인생의 전부라면 누구라도 저항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저항은 자각이 아닌 본능인지 모릅니다. 저는 양심적인 가스띨요라고 한 명의 특정인을 받아들입니다. 바로 산토 도밍고 호텔을 지은 에드가(edgar)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지진으로 매몰되어 폐허가 된 예수회 수도원을 1986년에 지금의 호텔로 개조했습니다. 예수회는 카를로스 3세가 1767년에 발표한 칙령에 의해 스페인 본국과 식민지에서 추방되기도 했지만, 그러기까지 남미에서 가장 활동적이면서 많은 부를 쌓은 왕성한 교단이었습니다.
그러니만큼 지진에 의해 파괴되기 전 수도원은 안티구아에서 가장 웅장하고 우아했습니다. 300년 전 만들어진 수도원의 잔해인 건물 벽 두께를 보면 수도원이 얼마나 견고하고 거대한 규모였는지 짐작이 갑니다. 산토 도밍고 호텔은 폐허 속에 방치된 건물의 잔해를 그대로 살리고 덧대는 방식으로 호텔을 축조하여 실내의 우아함과 회랑의 고풍스러움이 300년 전 모습 그대로 풍겨나옵니다. 특히 객실로 가는 긴 회할은 옛 수도사들이 다녔던 통로 그대로여서 마치 총총 걸음으로 신에게 달려가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호텔의 자랑 중 하나는 숙박 시설인데, 숙박 시설임에도 박물관과 전시실을 따로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박물관에 들어서면 정교한 예술품과 우아한 분위기에 풀썩 주저앉게 됩니다. 허물어진 벽을 그대로 살려 조형물을 배치한 예술 감각이나 과테말라 각지에서 출토된 마야의 유물과 현대 작가의 작품을 하나의 전시 공간에 같이 진열해 놓았습니다.
과거와 현대를 호응하는 독특한 진열 방식까지 한발 한발 딛을 때마다 가치에 가치를 더합니다. 규모로는 국가 박물관에 모자라겠지만 내용으로는 국가를 넘어 섰다는 데 공감하게 됩니다. 호텔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매주 금요일 9시에 숙박객들을 위해 무료로 박물관을 운영합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묵었다는 사실은 이제 진부한 홍보 문구입니다. 대통령이 묵을만큼 좋은 호텔이 아니라, 이런 호텔을 알아본 빌 클린턴이 빛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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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나오며 에드가, 그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집니다. 한 곳에는 호텔을 건축하는 과정이 사진과 함께 설명되어 있습니다. 마을 위원회를 만들어 왜 호텔을 지어야 하고, 왜 문화를 유지해야 하는지를 모두의 공감과 동의를 끌어내는 장면이 인상 깊습니다.
사진 상으로만 그런지 실제로도 진행이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개인의 노고와 재산이 아닌 안티구아 전체의 재산이라는 가이드의 말이 새삼 의미 심장합니다. 하나의 호텔이 도시 전체의 자랑이자 재산이 될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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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는 과테말라 뿐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인 Gallo 맥주의 소유주이기도 합니다. 그기 전통적으로 부유한 대 농장주의 아들일거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큰 규모의 호텔과 고가의 예술품을 모아 박물관을 만드려면 대단한 재산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는 시대에 걸맞는 현명한 부자여서 좋습니다.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 보면 재산이 많은 부농의 아들이 나옵니다. 격변기에 양심적이지만 유약한 자산가는 누군가를 구해주기 위해 선뜻 땅마지기를 내놓고, 학도병으로 끌려가는 누군가를 빼주는 조건으로 전 재산을 털어 비행기를 사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김성녀 님이 15년간 이어가는 모노 연극 ‘벽속의 요정’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옵니다.
피북행열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물려 받은 땅을 머슴과 소작인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건만 공산주의자로 몰려 젊은 시절을 벽 뒤에 숨어 보냅니다. 양심적이고, 지성적인 자산가는 재산만 다 잃을 뿐 얻는 게 없습니다. 그리고 재산이 줄어드는 만큼 한없이 약해지기만 합니다. 만약 땅 주인이 재산을 이용해 권력과 동거했다면 주변으로부터 욕을 먹을지언정 남 눈치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을 것 입니다. 물론 격변기의 한국 근대사를 보면 어느 줄에 서 있어야 안전한지 한치 앞도 알 수 없긴 합니다.
안티구아의 양심적인 지식인이며 재산가인 에드가라는 사람을 제 마음대로 상상해 봅니다. 그는 대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나 청년시절 스페인과 파리로 유학을 갔고, 파리의 자유로운 정신과 예술 혼을 듬뿍 받으며 성장하던 중 아버지의 부름으로 귀국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그 결과물로 태어난 것이 산토 도밍고 호텔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여기에 더해 농장이 아닌 공장으로 비즈니스 영역을 넓히며, 더 많은 재산가가 되지 않았을까요? 그랬다면 에드가는 아주 현명하고 양심적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 변화를 감지하고 줄을 잘 선 듯합니다. 탐욕스런 대지주로 남았다면 몸은 편했겠지만 명예를 잃었을테고, 정치와 동거하려 했다면 민중의 시대 명예 뿐 아니라 부도 많이 잃었을지 모릅니다.
아버지 세대와 함께 지나가는 그림자의 뒤를쫓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준비한 건 현명한 사람의 복입니다. 저의 상상이 만들어낸 양심적인 까스띨요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안티구아 산토 도밍고 호텔에서의 가슴 떨리는 밤을 보냅니다.
안티구아에서의 이틀 째, 커피 투어를 시작합니다. 커피는 에디오피아에서 시작해 이슬람 수도사인 데르비시에 의해 이슬람 세계에 전래되고, 십자군 전쟁을 통해 유럽에 전래되었다가 다시 진화하여 아시아로 들어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고종 황제가 커피를 좋아했다지만 일반적인 전래는 해방 후 미국이 가져다준 커피 문화가 진정한 시작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다 70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산업화와 함께 커피도 꽃 피웠고, 2000년대 들어서는 문화의 한 꼭지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인구대비 커피 수입량이 가장 많다는 우리 나라는 커피에 대한 문화적 성숙도 그에 준해 풍부해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과테말라는 중미에서 커피를 처음 재배한 나라이며, 커피 재배에 가장 좋은 토양을 가진 땅이기도 합니다.
2014년 미국에서 꼽은 가장 질 좋은 커피로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과테말라가 꼽혔는데 전통 커피 생산국인 에디오피아, 브라질이 들어있지 않고 뒤를 이어 커피의 대명사로 불리던 케냐, 자바의 고원지대 커피도 순위에 들지 못한 걸 보면 네팔과 함께 신흥 커피 강국이라는 말이 어울릴 듯 합니다. 안티구아에서 재배하는 커피는 최근 가장 고급으로 각광받는 아라비카 커피입니다. 그런데 아라비카는 나무가 약해 뿌리가 튼튼한 로부스타 종 커피 나무 상단에 젖을 붙인답니다.
또 좋은 품질의 원두를 얻기위해 나무는 수령이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일정 수령이 지나면 품질이 떨어지는 커피가 생산되기 때문에 베어 버리고 다시 새 나무를 가져다 심는다고 합니다. 그 기간이 무려 5년 정도라네요.. 우리가 아는 상식과 달리 모판에서 종묘를 키우고 어느 정도 크면 밭으로 옮겨 심고, 커피 열매를 맺으면 손으로 일일이 하나씩 따서 말리고 콩을 골라 로스팅하는 전 과정 끝에 찐한 에스프레소가 나온다니, 커피 한 잔의 노고가 얼마나 대단한지 진지하게 커피를 마셔야겠습니다.
트럭을 개조한 차를 타고 농장을 한 바퀴 도는데 규모가 대단합니다. 어린 시절 영화 러브 스토리에서 보았던 저택이 생각날 정도입니다. 정문을 들어서도 한참 숲길을 달려야 나오는 대 저택, 그리고 집사가 하인과 나와 공손히 인사하며 정중히 맞이하는 그런 집이 바로 여기입니다. 대농장주의 집입니다. 영화 자이언트에 더한 장면도 나옵니다.
기차가 하루 종일 달려 도착한 작은 역사는 농장 안에 있는 역이죠,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반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무법천지 같은 일이 강탈이 아닌 합법으로 자리하게 된 건 스페인 오아실이 행한 엔꼬미엔다(Encomienda) 제도 때문입니다. 인디언의 정신적, 신체적 보호의 의무를 지는 대신 이들의 노동력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제도인데 결국 이들의 모든 땅을 독점적으로 소유함으로써 대농장주가 됩니다. 아즈텍이나 잉카는 사회주의적 성격이 강한 사회 체제여서 사적 소유에 대한 개념이 미약합니다.
당시 아즈텍이나 잉카는 모든 토지가 국가 소유이거나 공동체 소유였기 때문에 토지의 개인 소유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니 대농장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모두를 그 안에 묶어 두고, 댓가없는 노동력을 요구하니 아즈텍이나 잉카의 대리 황제가 된 셈입니다. 옛날 황제가 그랬듯이 대농장주도 말합니다. "내가 너희들을 먹여주고 신변을 보호해 줄테니 무임금으로 열심히 내 땅에서 일해라" 또 잉카엔 미따제도가 있는데 무료로 건축이나 기타 국가 사업에 동원되는 무료 노동제공 제도입니다.
그러니 대농장주는 말합니다. "내가 너희 왕이 하던 일을 대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크게 다릅니다. 미따라는 제도는 무료 인력 동원 횟수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고, 농번기엔 노동력을 동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한 모든 수확물은 일정 비율로 분배했는데, 수확물의 30%는 잉카(잉카 제국의 황제를 칭함)소유, 30%는 공동체 소유, 그리고 남은 40%는 비상 식량으로 비축했다가 어려운 사람이나 비상 시국에 사용합니다. 즉 40%는 복지비라고 봐도 무방하므로 가장 복지가 잘된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어느 사회도 총 생산량의 40%를 복지에 사용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잉카와 미타와 엔꼬미엔다는 말은 같지만 내용은 천지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도 말기에 접어들어 민란이 자주 일어난 걸 보면 토지의 지중화가 심각했다고 보여집니다. 한국 역사는 일본의 침탈과 견주어 봐야 합니다. 일본의 조선 침탈은 여러 부정적인 면을 낳았음에도 한 가지 긍정적인 면을 낳지 않았을까요. 제 생각엔 기존 양반의 몰락입니다. 우리 힘으로 해결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양반 층의 해체는 새로운 가능성과 시대를 연 사건이었습니다. 남미는 그런 사건이 혁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혁명을 통해 권력의 주축이 바뀌고 독점적 권력이 민중에게 조금씩 돌아가면서 민주화, 근대화가 됩니다. 남미의 토지 왜곡은 특히 심해서 20세기 초반까지 멕시코의 경우 인구 1%가 토지의 97%, 페루는 인구 1%가 토지 80%의 땅을 소유하는 기형적 사회 구조였습니다. 그러니 혁명의 나팔이 울려퍼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나라가 1948년 명목적으로나마 토지 개혁을 했듯이 남미는 좌파가 정권을 잡고서야 토지 개혁을 실시합니다. 볼리비아는 1952년 혁명 성공 후 토지 개혁을 했으며, 체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농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쓸쓸한 최후를 맞은 건 토지 개혁에 호응한 농심이 체게바라에게 무심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 과테말라 1954년, 쿠바 1959년, 칠레 1970년, 니카라과 1979년 등 남미는 60, 70년대의 좌파 혁명을 통해서 많은 피를 보고서야 토지 개혁을 실시했으니 대한민국의 현명한 선택이 돋보입니다. 물론 과테말라와 칠레는 군사 쿠테타로 인해 대폭 수정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시대의 흐름을 왜곡해도 억류하지는 못하므로 천천히 토지는 농자의 손에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소유의 집적화는 사회 발전의 큰 장애 요인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하루 10끼를 먹는 것이 아니고, 신발을 10켤레 신지 않습니다. 하나의 고가품을 만들기 보다는 10개의 범용 상품을 만들어야 공장이 돌아갑니다.
그리고 고가품은 경쟁력있는 외국 회사의 몫이니, 대 농장 소유주는 재산이 고래등 같이 많지만 내 나라에 기여 하는 건 하나도 없는 셈입니다. 돈은 대부분 부유한 서구에 가서 소모하고 국내엔 변변한 공장 하나 들어서지 못합니다. 대 농장주에겐 살 게 없고, 소작인에겐 살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안티구아 산토 도밍고 호텔의 주인 에드가라는 사람을 생각해봅니다. 저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하나의 인물을 추론하고 그려봤을 뿐입니다. 하지만 저의 상상이 틀리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산토 도밍고 호텔은 과테말라의 양심과 양식, 그리고 예술의 혼이 살아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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